법관 ‘언어’와 국민 ‘언어’가 달라도 이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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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법관 ‘언어’와 국민 ‘언어’가 달라도 이건 아니다 스스로 바꾸지 않으면, 법원광장에 ‘촛불’로 가득찰 수 있음을 알아야

기사입력2018-02-08 18:53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유전무죄’, ‘사법부의 치욕’, ‘사법부의 민낯을 확인시킨 난장(亂場)’, ‘징역3년·집행유예5년이라는 재벌 봐주기 공식의 반복’….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 재판결과에 대한 시민사회 반응이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받아 수감 중이던 이 부회장에게 지난 5일 서울고등법원은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고, 같은날 이 부회장을 석방했다.

353일, 결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징역을 살았음에도 이 부회장에 대한 국민여론은 차갑다. 특히 항소심 재판부에 대해 다수 국민은 ‘비난’ 수준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쏟아낸다. 직접 행동에 나선 이들도 있다. 지난 5일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항소심 재판부 판결내용에 대해 특별감사를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특별감사 청원 제기후 사흘만인 8일 현재 서명참여자가 21만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재판부의 판단이 국민 판단과 현저하게 괴리됐음을 보여준다.

항소심 판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7일 전국 5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항소심 판결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않음(44.3%)’이란 응답이 ‘매우 공감함(18.7%)’보다 2배이상 많았다. ‘별로 공감하지 않음(18,7%)’·‘다소 공감함(17.0%)’이란 응답을 포함해 비교해도, 비공감(58.9%)비율이 공감(35.7%)비율보다 23.2%p 높다.

항소심 재판부가 판결문을 통해 적시한 사실관계와 적용법리, 그에 따른 양형의 결정 등 각각에 대한 당부를 따지는건 법률전문가의 몫이다. 법전을 머리에 베고 살지 않는 ‘보통사람’이 ‘법률전문가’의 판단에 법리를 빌어 토를 달기는 쉽지 않다. 법관의 언어와 국민의 ‘언어’가 달라서다. 그렇더라도 이번 재판결과에 국민 다수가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는, ‘언어’ 차이로만 치부하기에는 판결내용이 ‘사회통념’과 너무 배치되기 때문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권력층과 재벌간에 돈을 매개로 이뤄지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재판부가 상정하는 ‘전형적인 정경유착’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사회 ‘보통사람’이 상식에 근거해 묻는 질문에 재판부가 답해야 한다. 삼성그룹사 주총 또는 이사회 결정도 없이 이 부회장 독단으로 현직 대통령에게 수백억원을 건넨 사실, 그 자체가 ‘정경유착’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또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강압에 못 이겨 돈을 준 것”이라 했다. 이런 논리라면, 세상에 어떤 뇌물죄도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뇌물을 받는 자는 뇌물을 주는 자보다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 뇌물제공자가 느끼는 ‘강압’은 뇌물제공에 따른 반대급부의 만족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일 뿐, 면책사유는 될 수 없다. 재판부의 판시대로 이 부회장이 아무런 대가없이 ‘강압에 못 이겨 돈을 준 것’이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죄목을 강요죄가 아닌 강도죄로 바꿔야 한다.

항소심 재판부는 세상사람 모두가 알지만 재판부만 몰랐던(?) 사실관계도 판결문에 적었다.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인 현안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승계작업을 위한 묵시적인 청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승계작업을 위한 묵시적인 청탁’의 존부는 해석의 문제일 수 있어 재판부 재량이라고 치자. 그러나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인 현안’의 존부는 해석의 문제가 아닌 사실관계 확정의 문제다.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삼성그룹의 총수가 누가 될 것인가는, 우리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 부회장 구속 이후, 국내외 모든 언론이 삼성그룹 승계구도를 설명하기 위해 그룹사 지분율 등을 담은 도표까지 그려가며 소개했다. 이같은 사정을 고려하면,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의 존재를 이 부회장 본인은 물론이고 항소심 재판부도 알고 있었다고 보는게 합리적 추론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묵시적 청탁’의 대상 자체를 없애기 위해 ‘승계작업이라는 포괄적 현안’에 눈을 감는 방법을 택했다.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이 부회장의 ‘청탁죄’를 사해주기 위해 재판부가 만인이 인정하는 ‘사실관계’조차도 부정했다. 이번 재판결과는 시민사회가 지적한대로 ‘사법부의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대법원 최종심이 아직 남았다는 점이다.

법원의 권위와 명예는 법원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전제는 재판을 통해 ‘법앞에 평등’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무죄’, ‘징역3년·집행유예5년’이란 오명을 법원 스스로 털어내지 못한다면, 사법부 적폐청산을 요구하는 새로운 ‘촛불’이 법원광장을 메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