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영상은 환영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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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영상은 환영을 만들어 그것의 움직임은 눈이 아닌 손의 연장이었음을…손의 일

기사입력2024-06-18 09:52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식당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작업실로 향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지난주에 작업실에 가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죄책감을 느꼈지만 외면해 버렸다. 초조한 마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틈틈이 작업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 모으고 있다. 필름을 자르기 위한 스플라이서(Film Splicer), 편집기(Film Editor), 필름과 필름을 이어내기 위해 필요한 접착제(Film Cement)나 접착테이프(Klebfoil) 그리고 크레딧용 필름(Filmvonspann), 양철 필름 보관함(Film Chest) 같은 것들을. 중고장터를 경유해 한국, 미국, 독일 등에서 슈퍼8(Super 8) 필름과 영상용 도구들이 내 작업실로 도착하고 있다.

<촬영=박선호>

아거스(Argus) 사에서 나온 필름 편집기를 받았는데 그간 열어보지도 못했다. 테스트를 진행하지 못한 채 구매확정일이 지났다. 친구가 작업실 안에 들여놔 준 커다란 과일 박스를 열어보니 ‘Argus’라고 쓰여있는 또 다른 박스가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케케묵고 얼룩덜룩한 상자. 창고에서 비를 맞은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아빠진. 본체와 더불어 작은 부속품들이 딸려 왔다. 모두 처음 보는 모양에 설명서도 꾸깃꾸깃했다. 장치를 작업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사용법을 유추했다. 작은 텔레비전처럼 생긴 기계의 몸통 양쪽에는 필름 릴을 장착할 수 있는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이것은 필름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잘라내 편집하고 싶을 때 이미지를 살펴보기 위한 뷰어에 가깝다. 화면에 맺힌 상의 범위를 확인한 뒤 필름을 자르는 ‘스플라이서’라는 평평한 판 모양 칼날을 통해 필름을 잘라낼 수 있다. 필름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영사기와는 조금 다른 용도를 가진다

편집기. 편집을 위한 기계가 있다는 걸 이번 작업 리서치를 진행하며 처음 알았다. 그동안 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무언가를 만들어왔고, 편집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만 가능한 행위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편집과 관련한 내 첫 번째 기억은 어도비 포토샵(Adobe Photoshop) 6.0 버전을 활용해 스캔한 만화책 이미지에 브러쉬 툴로 그림과 도장을 찍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 일이다. 세상의 모든 새로운 것에는 번거롭고 물리적인 행위가 선행되었던 걸까. 언젠가 사진 수업 선생님께 들었던 ‘암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구현이 가능해졌다’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내가 다루는 필름은 사진보다 더 작고 훨씬 많은 상이 맺힌 비디오 필름이고 사진에 비해 더더욱 생소하지만 말이다.

아거스 슈퍼8 필름 편집기는 110v를 사용하는 기계인지라 변압기에 전원을 연결한 뒤 220v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아야 작동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변압기의 전원을 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당황했지만 설명서를 다시금 읽으며 기계 옆에 붙어있는 뻑뻑한 스위치를 힘주어 밀어 보니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낡아빠진 기계가 다행히 작동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고, 빨리 뭔가를 비춰보고 싶었다. 이전에 다른 물건을 사며 덤으로 받은 흑백 필름 한 릴이 눈에 들어왔다. 별다른 설명도 없고 필름이 낡아서 자꾸만 부서지는 바람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비로소 이 필름 속에 담긴 것을 살펴볼 수 있게 된 거다.

편집기의 한쪽에는 이 낡은 필름이 감겨있는 릴을, 다른 쪽에는 빈 필름 릴을 장착하고 램프를 켰다. 그 다음 손잡이(Reel Arm)를 돌리기 시작했고, 검은 바탕의 타이틀 페이지가 떠올랐다. 몇 초 후, 내 눈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과거에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들. 생생한 움직임, 플랫폼을 떠나는 기차. 한 지점에 멈춰 있는 이미지가 손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빙 이미지’(Moving Image). 이제야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영상은 환영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눈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움직임은 눈이 아닌 손의 연장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