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가는 게 실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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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실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 무료함의 노스탤지어…권상록 작가

기사입력2024-07-17 10:23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권상록, ‘숨었던’, 캔버스에 유화채색, 117×73cm, 2024.

권상록의 회화를 보았을 때,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형상 때문이었다. 마구 흔들리는 풍경을 순간 멈춰 세운 것처럼 비뚤어진 붓질 틈새로 어딘가 익숙한 형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단순화된 얼굴과 뭉툭하게 처리된 손발. 그것은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된 디지털 오브제, 그중에서도 2000년대에 유독 흥행했던 특정한 게임들에 흔하게 등장하던 캐릭터의 모델링이 분명해 보였다. 이미지를 그렇게 알아본 순간 감상은 확장되었다. 회화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환기하면서 노스탤지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노스탤지어는 분명히 문제적인 개념이다. 음악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오래전 말했듯이, 오늘날의 문화는 과거에 의해 집어삼켜지고 있다. 노스탤지어라는 단어는 원래 고향을 그리워한 끝에 앓게 된 병증을 가리키는 낱말이었다. 오늘날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시간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흔히 묘사되고는 한다. 고향을 잃은 이의 병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치료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노스탤지어는 치유 불가능한 병증이 되어 모든 이의 공통 감각을 잠식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이 잘못은 아닐 테다. 하지만 새로운 음악을 들어도, 새로운 소설을 읽어도, 그곳에 있는 것이 오직 과거일 뿐이라면 불만족스러움이 고개를 치켜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쩌면 노스탤지어의 이러한 작동은 점차 빨라지는 미디어의 소비 속도와 관련이 있다. 조너선 크레리는 오늘날의 세계가 일주일 내내, 24시간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인프라구조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시간 없음’이라는 시간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한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휴식을 취하는 모종의 시간 구분이 사라졌을 때 인간적 시간 역시 사라진다. 24시간 스위치가 켜져 있는 세계에는 어둠이 없고, 그러므로 타자성이 없다. 이 세계는 웹 아카이브에 가득 찬 과거로부터 타자성을 도려내어 매끈하게 미화한다. 달음박질치는 미디어의 속도는 아름다운 노스탤지어를 생산한다. 이렇게 선별된 과거에 비하면 현재는 투박하고 볼품없는 것이다.

권상록, ‘마주하고’, 캔버스에 유화채색, 72×72cm, 2024.

권상록의 회화 또한 반갑고 반짝이는 노스탤지어를 불러들인다. 회화를 보고 있으면 지나간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감각이 온몸에 떠오른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찾아온 감각 또한 있었다. 무료함이었다. 권상록이 환기한 풍경은 꽤 구체적인 것이었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누군가라면 어떤 게임의 어떤 캐릭터인지를 짚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러했다. 따라서 향수 역시 구체적이었다. 과거 속 그때 만들어진 게임들은 지금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게 더 많았고, 이 같은 제약은 무료함을 자아냈다. 반복해서 같은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좁디좁아 나갈 수 없는 가상공간을 끝없이 떠돌거나. 권상록의 작업이 불러들인 노스탤지어는 과거로 돌아가는 게 실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환기했다. 조상의 묘에 성묘를 가는 게 언제나 하품이 나는 일인 것처럼.

권상록의 몇몇 작업에서는 붓질이 특히 두드러진다. 가상의 형상에 일부러 물질성을 불어넣는 붓질은 가상성과 물질성이라는 양가적 차원을 회화 안에 붙잡아두는 도구다. 권상록의 회화 속 형상은 들뜨거나 즐거운 얼굴이 아니고, 쓸쓸해 보이고 또 정처 없어 보인다. 가상성과 물질성만큼이나 양가적인 노스탤지어의 아름다움과 무료함 또한 회화를 매개체 삼아 교차한다. 여러 겹의 해석이 맞붙는 장소로서 회화는 양가성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끄집어낼 줄 안다. 아직은.

크레리는 무료함을 의미 있는 힘이라고 평가했다. 계속해서 나를 접속하게 만들고 깨어 있게 만드는 네트워크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몽상이라는 무의미하고 ‘인간적인’ 시간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고 말이다. 모든 추억담에는 빛나는 향수만큼이나 숨기고 싶은 통증이 있다. 욱신거리는 노스탤지어의 아픔을 진정으로 달래기 위해서는 멀끔하게 미화된 과거가 아니라 무료하고 쓸쓸한 과거가 필요할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