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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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시공간이길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쇼케이스였지만…초대의 마음

기사입력2024-12-18 09:18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지난달 올해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를 공유하기 위한 쇼케이스를 열었다. 전시보다 가벼운 형태로 임하려고 했지만, 준비 과정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왔다. 기획 전시에 참여할 때는 ‘커미션’이라는 명목으로 소정의 제작비를 받으며, 기획자와 대화를 나누고, 관심사를 공유하며, 전시의 전체적인 방향성과 잘 어울리는 내용과 형식을 고민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작품을 만들 때도 ‘맞는 방향’이나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번 공유회는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의 제안이나 조언 없이 오롯이 나만의 리서치 결과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설렘과 부담이 뒤섞여 있었다.

쇼케이스는 토요일과 일요일,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IMF Seoul’에서 이틀간 진행되었다. 이전에 잠시 소개한 적 있는 IMF Seoul은 26년간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된 아파트를 전시장으로 활용한 공간이다. 일반적인 전시공간이 흰 벽과 접근성, 그리고 공공성을 갖추고 있다면, 이곳은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양한 무늬의 벽지, 비교적 낮은 접근성, 그리고 ‘거주공간’이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에 방문 예약이 필수인 독특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

누군가가 집을 나와 이곳에 도착해 시간을 보내는 과정을 상상해 보니, 이런 특성이 오히려 흥미롭게 다가왔다. 초대부터 실제로 공간에 도착하기까지가 커다란 기획이 될 수 있도록 나만의 방식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결과 공유회를 준비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나답게 이 프로젝트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초대 메일을 보냈다. 30분 단위로 한 명에서 두 명 정도의 손님만 들어올 수 있도록 관람 예약을 받았다.

박선호, ‘6fps 만큼 부족한:Super 8mm 필름을 활용한 잡동사니 영상 제작을 위한 리서치’ 2024년 10월26일~10월27일, IMF Seoul, 쇼케이스 전경. <사진 촬영=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공유회를 한 달 앞두고 아파트에 방문했다. 거실, 부엌, 그리고 두 개의 방의 치수를 재며, 영상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스크린의 크기를 떠올렸다. 몇 가지 생각을 적어두었다. “가정용 TV보다는 큰 스크린이면 좋겠다.”, “하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여야 한다.” 그날은 햇볕이 많이 드는 맑은 날이었다. 인근 초등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낮에 방문할 사람도 영상을 편안히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깥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을까?” 이후, 사람들이 천천히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벤치를 놓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이 앉을 수 있지만, 혼자 앉아도 전혀 쓸쓸하지 않을 크기의 벤치. 이왕이면 빈티지한 멋스러움을 지닌, 저채도의 벽지 무늬와 잘 어울리는 것으로 골랐다.

이후 안방을 둘러보았다. 둥근 아치형 문에는 회색 몰딩이 붙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베란다와 연결된 커다란 창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 안은 분홍빛 실크 벽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창문에 꼭 맞는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하고 싶었다. 스크린을 밝히는 프로젝터의 빛이 실크 벽지 위에 수 놓인 꽃잎을 희미하게 밝힐 수 있도록. 마치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잠든 누군가가 꿈을 꾸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

그다음, 부엌과 작은 방으로 이동해 그 공간에 어울릴 만한 요소들을 찾아보았고 공간을 둘러보며 쇼케이스를 상상할수록 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프로젝트는 나만의 것이지만, 이를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구현했을 때는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여주고자 했던 쇼케이스는 내가 준비한 것들로부터 방문자들이 각자 새로운 기억과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말 그들만을 위한 어떤 시공간이길 바랐다.

쇼케이스가 열린 이틀간, 초대된 사람들이 조용히 영상을 바라보거나 공간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오래된 벽지의 무늬와 어우러진 프로젝터의 빛을 흥미롭게 관찰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가만히 벤치에 앉아 시간을 음미했다. 전시장에서의 경험과 감상을 더해 자신만의 해석을 건네준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보며 안부를 묻고 프로젝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 초대의 마음을 돌려준 관객들이 잘 머무르고 간 뒤 나눠준 경험이 앞으로의 나의 작업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한해의 끝에서,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더 잘 보여주기 위해 썼던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해 본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