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의 전통 위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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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의 전통 위에 세워진다 영원히 빛나는 것을 그리다…박생광의 미술세계

기사입력2021-11-07 10:0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BTS와 콜드플레이가 함께 국어와 영어로 노래를 부르고, 어릴 적 추억의 놀이들을 소재로 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 넷플릭스 순위를 휩쓸고 있는 요즘, 과연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이전 세대와 다른 문제가 됐다.

최근의 ‘한국적인 것’은 세계무대에서 현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특수성과 보편성을 얼마나 잘 결합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됐다. 그러나 과거의 ‘한국적인 것’은 이와는 다른 문제였다. 급속한 산업의 발달과 이질적인 문화들이 무분별하게 복제되고 배포되는 과정에서,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던 이슈 중 하나가 ‘한국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전봉준, 종이에 채색, 360×510, 1985,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적인 것’을 찾아=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한국을 기반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묻는 질문 중 하나가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다.

미술가 박생광도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도 많이 했던 작가 중 한명이다. 190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박생광은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배웠다. 그리고 1945년 해방 후 귀국해 미술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 한국화단은 일본화풍을 배격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그는 주요 무대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진주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71세인 1974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활동을 하던 중 1977년 한국 진화랑의 초청을 받고 개인전을 하게 됐다.

그는 이 때 한국의 전통적 소재들을 재조합한 그림을 선보였다. 이듬해 한국으로 귀국한 그는 1982년 인도 여행을 통해 그만의 독자적인 소재와 화풍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무당, 종이에 채색, 130×70cm, 19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재의 발견과 확장=1977년 진화랑에서의 전시 이후, 박생광을 매료시킨 것은 한국의 불교와 무속신앙이었다.

그의 고향인 진주는 진주성과 촉석루 등 조선시대의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도시다. 그리고 불교문화 역시 주변에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이런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는 고등학생 시절 스님이 되기를 잠시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청담스님과 교류하며, 불교문화에 남다른 조예를 갖게 되기도 했다.

그는 줄곧 경주의 범어사와 부석사를 찾으며 스케치를 하고 불교의 여러 소재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구상했는데, 이런 옛것에 대한 관심은 향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1980년 이후에는 만신 김금화의 굿을 보고 무속신앙에 매료돼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박생광은 동학의 기조를 샤머니즘으로 보고, 샤머니즘을 한국의 진정한 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굿은 산자와 원한이 많은 죽은 자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가 그린 ‘명성황후’와 ‘동학도’와 같은 그림은 그 역사적 사건이 지닌 안타까움과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일종의 씻김굿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생광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로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는 전통 색상인 오방색을 주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가지 색상 중 그는 붉은색으로 선을 긋고 보색인 청색으로 면을 채색해 주목도를 높였다. 이 주홍색의 선묘화는 민화를 비롯해 불화나 탱화, 단청 등에서도 많이 사용된 기법이다.

오방색은 적색, 청색, 황색, 백색, 흑색으로 색마다 각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박생광은 이의 의미를 그림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무속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는 이의 특징이 더 잘 나타나 있다.

제왕, 종이에 채색, 136×138, 1982, 국립현대미술관.

◇민족예술과 민족의 전통=한국은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을 치른 역사를 갖고 있다. 특히 일본의 침략과 한국전쟁은 개인들에게 큰 고통과 비극적인 삶을 안겼다.

한국인들은 그 아픈 기억들을 ‘한’으로 기억하고 표현한다. 그래서 ‘한’의 정서를 기반으로 남다른 무속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오가는 무속 행위들을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박생광은 자신의 작품에 무속의 정서를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이 최근 들어 관심을 받고 있는데, 지금까지 묵묵히 그림에 정진해 왔던 그간의 노력과 세월에 대한 역사의 보상이라 여겨진다. 그가 경험한 한국전쟁과 일본유학으로 인한 한국화단에서의 배척의 시간들은, 오히려 작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견고하게 다지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가 창조해낸 미술세계는 독자성을 인정받아 사후에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