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우연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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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저자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우연을 본다 우연성의 자국들…송민지 작가

기사입력2024-12-24 08:39

황재민 미술평론가 (yunics@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회화에 대해 말하며 화가를 말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오늘날 ‘저자는 죽었다’라는 선언이 준 충격이 어느새 사그라졌지만, 이제는 인간이라는 특정한 주체성의 형식이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신유물론과 같은 사유는 인간이 여태껏 지식 권력과 사회적 관계의 생산에 있어 특권적인 위치를 차지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에서 존재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인간이 그간 독점해온 주체성의 자리를 흐트러뜨리고 개방하는 중이다(인공지능에 의한 인간 창의력의 상대화라는 문제는 일단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여전히, 화가라는 문제, ‘누가 그리느냐’라는 문제는 끈질기게 회화를 쫓고 있다.

물론 회화에서도 저자성에 대한 실험이 있어 왔다. 예컨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물감과 붓이 아니라 산업용 페인트와 도배공의 붓을 사용하면서, 회화를 만든 것이 천재적이고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에 가까운 주체임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유타 쾨터의 경우, 회화를 전시장 벽에 붙박인 완결된 작품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바라보며, 퍼포먼스 등의 매체와 유연하게 연결될 수 있는 일종의 플랫폼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과거의 사례는 회화 내에서도 저자성과 주체성에 대한 실험이 존재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무언가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회화에 대해 말하며 화가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땐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송민지, ‘Untitled’, 2023, oil on canvas, 145.5×193.9cm, 촬영:양이언.

송민지의 작업 또한 저자성을 둘러싼 실험과 얼마간 맞닿는다. 작가는 회화를 제작하며 붓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송민지는 캔버스 천이 서로 겹쳐지거나 휘어지게 만들며, 물감이 천의 움직임을 따라 운동하게끔 했다. 물감은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면서 천천히 말라 붙었고, 시간 속에서 자국을 만들며 회화로 완성되었다. 이때 회화를 만드는 것은 작가의 의도나 관심이 아니라, 천과 물감,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작가 신체 사이에서 돌출하는 불확실성이었다.

송민지의 회화에서는 물감이 흘러내린 자국, 캔버스를 접거나 다시 편 자국 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붓질이 만들어내는 독특하고 입체적인 질감 대신, 평평하게 말라 붙은 질감이 남는다. 붓질은 조금 특별한 요소다. 붓질은 그 자체로 회화를 구성하는 신화적 요소 중 하나다. 만약 회화를 실물로, ‘진짜로’ 직접 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우 붓질 때문이다. 화가의 무의식 속 각인된 회화에 대한 이해가 그의 숙련된 몸짓으로, 물감과 같은 물질과의 싸움 끝에, 마침내 캔버스 위로 도달할 때 느껴지는 복잡한 즐거움을, 붓질은 준다.

하지만 송민지가 남긴 자국은 붓질로 대표되는 저자성의 환상으로부터 얼마간 뒤로 물러난다.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과 몸짓 등이 아니라, 단지 물감과 천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힘을 보여줄 따름이다. 물감이 흐르고 마르는 시간의 움직임을, 천이 구겨지고 휘어짐에 따라 드러난 중력의 움직임이 회화 위에 새겨진다. 여기서는 저자의 힘보다 시간과 중력의 힘이 앞서게 된다. 이 회화에 남겨진 힘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것이며, 작가의 것도, 인간의 것도 아닌, 단지 세계의 것이다.

송민지는 지난 2024년 1월19일부터 2월9일까지, ‘인터럼(Interim)’이라는 공간에서 첫번째 개인전 ‘WELL’(2024)을 열었다. 여기서 작가는 ‘1.15.-1.18’(2024)이라는 작업을 제작했는데, 가로 7미터 정도의 크기로 전시장의 벽을 꽉 채우는 형태였다. 이 회화는 작가가 전시 공간에 머물며 그곳에서 제작한 것으로, 그에 따라 ‘1.15.-1.18’에서는 해당 공간에서만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이 반영되었고, 공간의 흔적이 캔버스 위에 말라 붙어 있었다. 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이것은 오직 현재 만을 가리키는 회화였다. 과거 회화의 목적 중 하나는 영속성이었다. 회화는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무시간성을 생산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과거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대신 작가는 오로지 현재를, 현재를 구성하는 힘을, 끝없는 우연성의 영역으로 회화를 열어 보인다. 저자가 사라진 곳에서, 우리는 우연을 본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