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쓰인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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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쓰인 기억은 새로운 기억…한 대상에 얽힌 다양한 면을 살펴보고 조합하다

기사입력2023-06-04 1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2023년을 ‘미술작업 안식년’으로 정했다. 이와 별개로 올해 1월부터 회사에 출퇴근해 일하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누군가의 대리인처럼 일하고 이제야 적응기간이 지나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매일 매일 세상에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고 느끼지만, 온전히 혼자 작업하고 고민하는 외로운 시간이 잠시 줄었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또다시 외로움과 마주해야 할 시기에, 지금의 시간이 미래의 나를 지탱할 거라 믿는다.

작년에 시작했으나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도 있다. 부끄럽게도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마감기한에 쫓기고 있다. 자세한 내용을 언급할 수 없어 빗대어 말해보자면, 이 일은 이미 그려진 누군가의 초상화를 수정하는 일과 닮았다. 한 사람의 모습을 기록한 그림이 여러 이유로 시간이 지난 뒤 수정되어야 했지만, 사정상 원 그림을 그린 이가 그림을 수정할 수 없었다. 초상화 담당자들이 내게 연락을 주었고, 이전에 그려진 것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관점에서 새로운 부분을 추가해 그려달라 부탁받았다.

그림을 살펴보며 화가가 초상 속 인물과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간을 상상했다(언급했듯 비유적인 표현이다). 화가는 어떤 선택을 거쳐 초상화를 완성했을까? 질문을 이어보니 초상화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기억의 응집체로 다가온다. 나는 화가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새로운 기억을 써 내려가고 있다.

박선호, ‘금강:블루 프린트(Kumgang:Blue Print) 2019 ver.’, 2019, 싱글 채널 비디오, 15분02초, 비디오 스틸 이미지.

초상화 작업과 비슷하게 나는 2019년 다른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영상작업 ‘금강:블루프린트’를 제작했다. 이 작업은 2018년 미디어에서 마주한 금강산 이미지를 본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작업을 위해 금강산에 얽힌 나의 기억과 이야기,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기억을 모았다. 2000년대 초반 유년시절에 가족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온 나의 기억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 금강산에 다녀온 다른 사람의 경험을 수집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모이니 일반적으로 금강산을 칭하는 평화와는 먼 묶음이 됐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곳,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기쁜 곳, 혹은 눈송이와 바람이 많이 날리던 추운 곳…. 여러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나는 한 장소의 다양한 면면을 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시각화하기 위해 첫 번째로 여러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하나로 조합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고 낭독했다.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내준 사진 이미지를 아주 고전적인 복사 매체인 먹지를 이용해 흰 종이에 사진들을 베껴 그렸다. 여러 장의 이미지가 먹지를 통해 복사되며 엉켜 보이는 산 드로잉이 남았고, 낭독한 이야기와 이 과정을 영상으로 엮었다. 나는 이 과정을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이라 여겼다.

왜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이 중요할까? 앞서 언급한 초상화를 덧칠하는 것과 같이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얇고 흔한 것들에 깊이를 더하는 작업이다. 기억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고 늘 새로 쓰이기 마련이기에 ‘새로운 기억’이란 말은 진부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대상에 얽힌 다양한 면을 살펴보고 조합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싶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통해 새롭게 쓰인 기억은 관념과 상징보다 강한 힘을 가진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