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어린이집’ 논란서 드러난 저출생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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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밤 10시 어린이집’ 논란서 드러난 저출생 현실 ‘장시간 노동·야근’ 행태 개선없이는 저출생 대책도 소용없어

기사입력2023-06-16 00:00

이창호 기자 (xg139@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이젠 야근해도 걱정 없네요”…맞벌이 부부들 ‘환호’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직장 어린이집을 소개한 어느 경제지의 기사 제목 한줄이 인상적이다.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 퍼지면서 입소문을 탔는지, 13일 오후 포털 사이트에 게시된 기사에만 이틀도 지나지 않아 댓글이 2200개 넘게 달렸다. 정치적으로 논란인 사안이라면야 이정도 댓글도 많은 게 아니지만, 어린이집에 대한 기사에 이렇게 뜨거운 관심이 쏠린 것이 이례적이라면 이례적이다.

기사는 이 직장 어린이집으로 인해 맞벌이 부부의 부담이 줄어들었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어린이집이 밤 10시까지 운영한다면, 늦은 시간까지 야근한 맞벌이 부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루 네 끼의 식사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러나 댓글의 반응은 영 좋지가 않다. 어린아이가 밤 10시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하는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나,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게 옳다는 댓글들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기사로 알려진 직장어린이집은 HD현대가 지난 3월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신사옥 글로벌R&D센터에서 문을 연 곳이다. 당시 발표자료에서 HD현대는 “사내 어린이집 개원을 통해 직원들의 육아부담을 줄이고 가족친화적 기업문화 조성에 나선다”고 강조했다.

어린이집 운영시간에 대해서는 “직원들이 유연근무제를 채택하거나 귀가가 늦어진 경우에도 상황에 맞춰 등·하원 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야근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계열사들이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으니 그에 맞춰 어린이집 운영시간을 확대했다는 설명이다.

어린이집 운영시간을 확대하면, 맞벌이 부부의 육아부담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린이집을 소개하는 기사에 부정적인 댓글이 많이 달린 이유는, 일차적으로 “야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부가 모두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근본적인 문제란 것이다. 한국의 근로시간이 OECD 5위 수준이며, 평균보다 200시간 이상 길다는 사실이 다시한번 등장한다. 이것도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근로시간을 많이 줄인 결과다. 2010년대 초까지도 한국은 OECD 근로시간 순위 1~2위를 다투던 나라였다.

근로시간이 이렇게 길고 야근이 많다보니, 출산과 육아에 필요한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출산·육아 지원제도 중에서도 ‘시간’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많지만, 이런 제도들이 실효성있게 운영되지 못 하니 맞벌이 부부들은 언제나 시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국회 입법조사처가 펴낸 ‘사업주·근로자의 모·부성보호제도 인지율 제고 입법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사업체 인사담당자들 중 32.3%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에 대해 모른다고 답했다. 2021년 고용노동부의 사업체 조사가 근거다.

이 조사에 따르면,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모른다는 응답은 15.2%, 배우자 출산휴가를 모른다는 응답은 18.7%에 달했다. 가족돌봄 휴직제도(42.7%), 가족돌봄 휴가제도(44.4%), 가족돌봄 근로시간 단축제도(49.2%)를 모른다는 응답은 40%를 넘어섰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육아휴직제도를 모른다는 응답 역시 13.5% 수준이었다.

기업의 인사담당자들마저 출산과 육아를 위해 시간을 보장하는 제도를 모를 지경이니, 제도가 얼마나 유명무실한지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이런 제도들이 없던 과거에는 어땠을까 싶지만, 그 시절에는 일례로 외벌이인 이웃이 홀로 남겨진 옆집 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돌봐주는 일도 흔했다. 이런 문화를 오늘날 맞벌이 부부의 육아부담 대책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맞벌이 부부에게 어린이집 운영시간 확대는 반가운 일일 수밖에 없다.

좋은 어린이집은 마땅히 필요하며 계속해서 확대돼야 하지만, 야근을 해도 걱정이 없어졌다고 좋아할 일은 결코 아니다. 육아부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전체적인 근로시간의 단축과 출산·육아를 위한 시간 보장제도의 제대로 된 운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맞벌이 부부에게 도움되는 시설에 부정적인 반응이 쏟아지는 장면에서, 한국의 저출생 현실을 다양한 각도에서 확인하게 된다. 중기이코노미 이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