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은 기본적으로 규제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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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은행은 기본적으로 규제산업이다 최소한의 규제마저 용인않겠다면 독점적 영업권 회수할 수밖에

기사입력2016-11-10 16:12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법원의 압류명령이 은행에 도달하기 전에는 대출자의 예금계좌에서 대출금을 은행이 상계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표준약관 개정에 대해 은행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시중은행에 2차례에 걸쳐 ‘기한의 이익’ 상실 사유를 변경하는 내용의 표준약관 개정안 사용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은행은 요지부동이다. 시중은행들이 기존 약관 사용 방침을 고집할 경우 공정위가 할 수 있는 조치는 ‘약관변경 명령권’ 발동이다. 표준약관에 따라 기존 약관을 바꾸라는 명령이지만 시중은행은 법원에 소송도 불사할 모양이다.

공정위는 지난 10월19일 기한의 이익 상실 사유를 명시한 은행여신거래 기본약관 제7조 제1항을 개정했다. 기존에는 ‘제 예치금 기타 은행에 대한 채권에 대하여 가압류·압류명령이나 체납처분 압류통지가 발송된 때’ 기한의 이익이 상실됐지만, 개정 약관에서는 ‘가압류’가 삭제했다. 또 ‘발송된 때’를 ‘도달한 때’로 바꿔 가압류만으로는 기한의 이익이 상실되지 않고 (본)압류명령이 있어야만 기한의 이익이 상실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대출약관상 기한의 이익이란 차주가 약정된 대출기간 만료시까지는 대출금을 상환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기한의 이익이 상실되면 만기 도래 이전에도 은행은 차주의 대출금 전액을 회수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은행은 차주의 계좌가 가압류되면 별도의 통지없이 차주의 은행계좌 예금잔액으로 대출원리금을 가져갔다. 차주계좌를 가압류 한 채권자 보다 먼저 대출원리금을 챙김음으로써 은행은 부실채권의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가압류는 채권자가 추측정도의 소명만으로도 인용되는 임시적 보전절차다. 공정위에 따르면 2002년~2014년까지 전국 법원의 가압류 인용률은 신청 대비 90.27%다. 채권자가 신청만 하면 가압류를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누군가가 예금계좌를 가압류했다는 이유만으로 대출원리금 전액을 즉시 변제해야 하는 것이다. 재무상황이 건실한 기업 또는 소상공인 입장에선 예측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유동성 위기로 도산 등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공정위가 여신거래 약관 개정에 나선 이유다.

표준약관 개정을 통해 은행의 우선변제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대출리스크가 커져 금리를 올리든가, 담보를 더 요구하는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 은행의 반대이유다. 그러나 은행의 반대주장은 은행 존재의 이유, 리스크에 대한 관리책임을 전혀 부담하지 않고 ‘땅 짚고 헤엄치는 식’의 장사를 계속하겠다는 억지다. 은행이 대출을 실행할때 대출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적격심사를 하는 것은 은행 본래의 역할이고 책임이다. 우리나라 은행 모두는 상환능력에 대한 ‘묻지마’ 대출을 통해 은행 자체의 부실을 초래했고, 공적자금을 수혈받아 살아난 ‘전과’를 갖고 있다. 빚을 ‘갚아야 할 돈’으로 여기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고 가는 돈’으로 보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은 은행의 무차별적 대출관행이 초래한 결과다. 연말이면 가계부채 1300조원을 넘어 가계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는 사회, ‘빚더미 공화국’에 대한 책임의 상당부분은 은행의 몫이다.

우선변제권을 부정할 경우 대출금을 회수하기 위해 은행이 대출자 자산에 대한 압류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이 경우 소송비용을 대출자가 부담하기 때문에 대출자의 부담도 커진다는 반대논리도 펴고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꼴이다. 부실채권을 최소화하는 대출관행을 정착시켜 고객에 대한 소송을 최소화하는 것이 은행이 할 일이다.

표준약과 개정에 대한 또 다른 반대 논거는 우선변제권이 전세계 은행에서 시행하는 일반적인 제도란 것이다. 그리고 예금 가압류시 은행이 먼저 처분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들어 법원까지 가겠다는 입장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국내 은행의 이자수익은 지난해 동기 대비 2000억원 가량 증가한 8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 2분기 기준금리가 1.75%에서 올 2분기에는 1.25%, 0.5%p 떨어졌음에도 이자수익은 오히려 늘어났다. 기준금리가 올라도 또 떨어져도 예대마진 수익률은 계속 증가하는 ‘비세계적’ 은행이 우리나라 은행이다. 예대마진에 목을 매고, 수수료 수입에 혈안이 돼 ‘돈놀이’만을 하는 은행이 세계 어디에 존재하는지 묻고 싶다.

대법원 판례 역시 반대 근거로서 설득력이 전혀 없다. 법원은 재판 시점에 명문화된 법과 제도 그리고 관행에 따라 심리하고 판결한다. 기존 약관이 은행의 우선변제권을 인정하고 있고, 이를 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어 당연히 우선변제권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공정위가 사용을 요청한 표준약관이 법적인 강제력이 없어 은행이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면 법으로 명시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변경된 표준약관의 내용이 사회통념과 금융거래 관행 및 질서에 비춰 정당성을 갖느냐 여부다. 표준약관 개정으로 얻는 금융소비자의 사회적 공익이 은행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보다 천배, 만배 크다는 점에서 정당성에 어떠한 하자도 없다.

은행은 기본적으로 규제산업이다. 삼성이 KB국민은행보다 돈이 없어서, 또 돈되는 장사가 아니라서 은행업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삼성의 공격으로부터 국가가 KB국민은행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을 국가가 특정 자본으로부터 보호하는 이유는 금융의 공공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은행 스스로도 인식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럼에도 표준약관 개정과정에서 보여준 은행의 탐욕은 ‘베니스상인’의 ‘샤일록’이 보였던 탐욕과 다르지 않다. 금융의 공공성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마저 모두 벗어던지고 싶다면 국가 그리고 국민은 은행의 독점적 영업권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