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을 넘어서는 안된다…권한대행일 뿐이다

프린트

오피니언 ㅣ 사설 권한을 넘어서는 안된다…권한대행일 뿐이다 정부 소임은 ‘국민의’ 정국 주도권을 보호하는 것

기사입력2017-01-23 19:51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신년 기자회견을 열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대통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황 권한대행이 ‘국가적 위기’라고 진단한 부분은 최근 특히 악화되고 있는 국내외 여건 속에서 계속되는 ‘일련의 사태’에 따른 ‘국론분열’과 ‘사회적 갈등’이다. 사태의 본질을 희석시키기 위해 에둘러 표현했지만, 황 권한대행이 언급한 ‘일련의 사태’는 ‘최순실·박근혜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이다. 황 권한대행 스스로도 ‘일련의 사태’로 인해 ‘서로를 반목·질시하고 적대시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위기진단에 대한 해법으로 황 권한대행은 “입장차에 따른 극단적 대립이나 이분법적 사고는 지양되어야 한다”며 “우리 헌법의 정신과 가치를 존중하는 바탕위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 정부 법무부장관 재임 당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 청구인 대표였던 황 권한대행은 ‘이분법적 사고’에 따라 국민들로부터 선택받은 대중정당을 해산시킨 일등공신이다. 또 국민을 좌우로 구분했던 공안검사 출신이 ‘다양성 인정’과 ‘조화와 균형’을 얘기하는 것 자체도 어색하다. 무엇보다 탄핵정국에 대한 진단과 해법이 국민들로부터 탄핵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고와 어법을 그대로 빼 닮았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갈등의 본질에 대한 천착은 아랑곳없이 천상에서 나타난 듯,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추호도 없다. ‘공자님 말씀’으로 국민들을 훈계하는 ‘유체이탈’ 화법은 박근혜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국론의 분열과 사회적 갈등은 통합이란 구호를 외침으로써 사그라질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분열과 갈등의 원인을 찾아 그 책임을 규명하고, 공과를 분명히 해 치유할 때만이 진정한 의미의 국민통합이 완성된다. 지금 여의도 정치권 특히 전국 경향 각지의 광장에서 꿈틀대는 역동적인 움직임은 우리 국민들 가슴속에 아직도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영혼도 없고 그 내용도 없고, 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사회통합’이란 헛된 구호로 국민들의 살아 숨쉬는 에너지를 덮을 수 없다.

정녕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안녕을 고심한다면 ‘국정농단’ 사건의 실체가 하루빨리 규명될 수 있도록 황 권한대행은 헌법에 따른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 전현직 고위관료들이 특별검사팀의 수사,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협조하도록 함으로써 무너진 국가기강을 세우는데 일조해야 한다. 특히 스스로도 기자회견을 통해 “이런 상황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국민 여러분께 참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거듭 드립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겉치레 면피용 언사가 아니고 국정농단 사건에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다면, 특검·헌재가 진실을 규명할 수 있도록 황 권한대행은 행정력을 통해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1000만 촛불로부터 비롯된 탄핵정국에 대한 진단과 해법도 문제지만, 황 권한대행의 오늘 기자회견은 형식과 내용 모두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회견 내용의 제목은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 새해 국정운영 방향과 그 내용’이다. ‘국민께 드리는 말씀’은 그렇다 치더라도, ‘새해 국정운영 방향과 내용’은 황 권한대행의 ‘권한’을 넘어선 월권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황 권한대행은 ▲국가안보 ▲경제정책 ▲민생안정 ▲국민안전 등 4가지 부문에 대한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4개부문의 정책 모두는 대국민 약속이기도 하지만 미국, 일본, 중국 등 관계 당사국에 대한 메시지 성격도 갖고 있다. 이들 4개부문 모두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계부처에서 정책과 대안을 세우고 집행을 해야 하는 국정과제다. 아무리 길게 봐도 반년, 짧으면 1~2개월의 대통령 권한대행이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새로운 정권하에서 국정기조의 전면적인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황 권한대행이 밝힌 국정운영 방향은 국민들과 관료 모두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또 기자회견 내용 각론을 보더라도 국가안보에 대한 대응책이라곤 ‘만반의 준비태세’와 관계 당사국과의 ’협의’ 또는 ’공조’가 전부다. 국민안전 부문 역시 ’안전대책에 점검과 보완’ 외에는 실질적인 메시지를 찾을 수 없다. 그마나 내용을 담고자 했던 경제정책·민생안전 부문의 경우에도 사정은 똑 같다. 경제정책 내용의 핵심은 ▲수출을 늘리고 ▲창업을 촉진하고 ▲규제를 개혁하고 ▲과학기술과 ICT를 통해 미래성장 동력을 찾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내용은 구호에 그칠 뿐 ‘어떻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어차피 정책을 수립할 시간도 부족하고, 집행 자체도 불투명하다는 권한대행 체제의 한계란 분석도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황 권한대행이 굳이 나서 신년 기자회견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 야당의 표현대로 ‘대통령 놀이’를 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더라도 오늘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경제현실과 산업정책에 대한 황 권한대행의 인식은 낡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우리경제가 어려운 이유는 수출이 안되서도 아니고, 창업을 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공정한 시장경제의 전제가 되는 규제가 작동하지 않아 대기업의 과실을 독점하는 약탈적인 산업생태계 때문이다. 국가차원에서 수출을 아무리 많이 한들 지금과 같은 승자독식 산업생태계하에서는 99% 중소기업·소상공인의 경영여건 그리고 이들 기업에 고용된 88% 근로자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다. 황 권한대행이 경제정책 방향이라고 밝힌 산업정책은 수십년 이상 지속돼온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 정책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않았다. 황 권한대행이 제시한 경제정책을 유지한다면 ‘1%만을 위한 경제구조’를 고착화시킬 뿐이고, 청년들의 문제의식인 ‘헬조선’은 계속될 뿐이다.

지금의 탄핵정국은 정치권이 만든 것도 아니고 황 권한대행을 비롯한 관료들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정치권과 관료조직은 탄핵정국을 초래한 주범 또는 종범 그리고 최소한 묵인·방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비정상’을 ‘정상화’하려는 1000만 촛불과 국민들의 명령을 이행하지는 못할지언정, 수구집단의 패악을 빌미로 역사를 거스르는 어떠한 시도도 해서는 안되고, 용납될 수도 없다. 국민적 여망을 담은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되기까지 1000만 촛불이 가진 정국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지금 정부에 주어진 역사적 소임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다른 불순한 목적과 의도로 권한을 넘어선다면 국민적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