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만이 존재하는 바다가 아니라 오방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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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푸른색만이 존재하는 바다가 아니라 오방색이 있다 한국적인 추상의 발견…전혁림

기사입력2021-04-11 10:0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푸른 바다 앞에 서면, 하늘과 수평을 이루며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질법한 풍경에 답답한 마음마저 내려놓게 된다. 무한히 펼쳐지는 파랑의 풍경은 어떤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 도시인들에게는 빠르게 지나가는 일상의 시간들에서 잊고 살았던 자연의 위대함에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바다에서 꽃피운 예술=통영에서 태어나 평생을 보낸 전혁림은 그 바다를 가슴에 품고 그렸다.

‘바다와 나비’, 캔버스에 유채, 182×220cm, 2001. 국립현대미술관.

1938년 부산미술전에 입선을 하며 미술활동을 시작한 전혁림은 해방 후 통영에서 김춘수,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과 같은 문인, 음악가들과 함께 모여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고, 예술에 대해 고민한다. 매주 전시회와 음악회를 하고, 야간 중학교를 운영하며, 장르를 불문한 탐구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민족정신을 이어간다는 사명감을 안고 열심히 창작활동에 정진했다. 그리고 1947년에는 경남미술연구회를 조직해 미술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국의 미술가들은 부산에 모여 화업을 이어갔으며, 전혁림 역시 이 행렬에 함께 했다. 그는 이 혼란의 시기에 ‘늪’이라는 추상화로 국전에서 수상을 하며 미술가로서 자리매김했다. 그는 정규 미술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파리로 미술유학을 가고 싶어 금융조합에 취업해 일을 하기도 했지만, 생활의 어려움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 시도한 다방면의 예술활동은 그의 평생 창작활동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만큼 예술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수 있게 해줬다. 전혁림은 서구의 미술잡지를 통해 늘 새로운 자극을 받았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으며, 그 결과 그만의 추상미술을 탄생시킬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민화에서 찾은 고유의 추상성=전혁림의 바다에는 그저 푸른색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방색이 등장한다. 알록달록한 색상은 마치 바다 위로 부서지는 햇빛이 연상되기도 하고, 자연의 모습이 비친 듯 보이기도 하며 다양한 연상을 가능하게 한다.

전혁림은 우리 민화, 단청, 탱화 등 민속적인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화는 사대부의 그림이나 사생을 중시하는 풍경화와는 달리 일상적이거나 교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재해석된 그림이 많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민화를 유심히 보고 색채와 형태, 그리고 그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민화에서 묘사된 사물들에서 ‘추상성’의 특징을 발견했으며, 서구의 추상미술과같이 우리의 미술에도 근본적으로 추상적인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한국풍물도’, 캔버스에 유채, 162×92cm, 2001. 국립현대미술관.

또한 통영은 자개를 비롯한 전통공예가 발달한 지역이다. 전혁림은 자수와 보자기 같은 공예품에도 관심을 가지고 자연이 단순화돼 표현되는 조형적 요소에 주목했다. 사실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공예품들은 이전 미술계에서 다소 저급한 미술로 분류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변의 미술을 통해 추상미술을 체화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조형요소들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보이지만, 그 조합은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간략하게 기호화된 사물의 조합과 강렬한 색상의 조화는 화면에 강렬함과 역동성을 더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힘은 한국적인 추상화라 불리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러한 그의 단단한 예술 심지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올해의 작가상’ 수상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100호가 넘는 크기의 그림을 그려내어 신작을 선보이는 저력을 가질 수 있었다.

◇전혁림의 바다=통영의 앞바다는 비교적 따스하고 온화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파도가 거세지 않고 여러 섬들과 바위가 있어서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고깃배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전혁림의 한국적인 추상 법칙은 평생을 주변에 둘러싸여 있던 바다 풍경을 그린 작품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전혁림은 바다를 감싸고 있는 부산과 통영이라는 지역에서 평생을 살며 애정 어린 마음으로 경남지역의 현대미술을 개척하는 역할을 했고, 사상과 지역에 얽매이거나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그만의 미술세계를 창조했다.

그가 묘사한 다소 투박하게 표현된, 추상과 구상미술의 사이에서 묘사된 바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의 애환을 읽기도 하고, 안온함을 느끼거나 자연의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민속미술의 조형성을 현대화한 시도는 한국적 추상의 새로운 포문을 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외에도 그의 바다 작품에는 청량하고 시원한 감상을 넘어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이 그리움은 아마도 작가가 평생 바닷가에서 살며 마치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하루에 대한 노스텔지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감정을 포용할 수 있을 법한 다정한 그의 바다처럼 우리 모두의 일상에서도 비슷하지만 매일매일이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