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엮어낸 한국의 아방가르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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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시공간을 엮어낸 한국의 아방가르디스트 아방가르드의 기수 김구림의 미술

기사입력2021-08-06 18:5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문명, 여자, 돈’,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8mm필름, 22분10초, 1969`2016. 국립현대미술관.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서울은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 도시화 과정의 시작단계에서 다양한 변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세운상가를 비롯한 고층빌딩들이 건립됐고 육교를 비롯해 자동차들을 위한 도로와 기반 시설이 구축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바뀌는 계기가 됐다. 급격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상대적 박탈감을 지닌 사람들이 생겨났으며,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 성공신화를 꿈꾸며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시화와 미술=도시의 내외부적인 환경변화와 맞물려 누구보다 영민하게 반응하는 미술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와 확장의 중심에 서 있는 김구림이라는 미술가는 상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누리고 자랐다.

이 풍요로움은 추후 그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있어 거침없이 추진해 나가는 미술가가 되는데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김구림은 서울로 상경해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교와 뜻이 맞지 않아 자퇴를 하고 자신만의 미술을 개척해 나갔다.

당시 미술대학교는 서울대파와 홍익대파로 나뉘어 치열한 경쟁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김구림은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그 어느 미술인과도 함께 전시를 하고 새로운 변혁을 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넓은 확장력을 지닌 미술은 한국을 너머 세계의 흐름에 발을 맞춰 나갈 수 있었다.

‘음양 7-S, 476’, 디지털프린트에 아크릴릭, 183×150cm, 2007. 국립현대미술관.

◇경계없는 미술=김구림의 미술은 한 기법에 천착하지 않고 정말 다양한 기술을 작품에 접목했다. 그가 선보인 한국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는 1969년 젊은이의 시선으로 변화하는 시대상을 표현했다. 10분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이 무성영화는 주변 미술인들을 동원해 제작했으며 담배 연기, 샤워하는 장면, 고가도로의 모습과 하품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또한 같은 해 최초의 누드 영화 ‘문명, 여자, 돈’을 선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 34살의 그가 바라본 서울사람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1970년 그는 해프닝이라는 새로운 미술장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곳에 적힌 지시문들로 개개인의 행위를 유발하는 ‘콘돔과 카바마인’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이후 ‘매스미디어의 유물’과 더불어 최초의 메일 아트로 기록되고 있다. 김구림은 이 메일 아트는 곧 손으로 글자를 쓰는 편지라는 것이 사라지기에 유물로 남기기 위해 실행했으며, 기계가 할 수 없는 것을 기획하고 실천한 프로젝트라고 했다.

또한 같은 해 ‘공간 구조69’라는 최초의 일렉트로닉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형광등 위에 다양한 색상의 셀로판지를 감싸고 그 위에 물과 기름이 섞인 관에서 이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작품이다.

그리고 1970년에 ‘제4집단’을 기획해 장르를 넘나들며 미술, 패션, 음악, 건축, 종교 등의 예술인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그들과 더불어 행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은 8월15일에 기성문화 체제의 장례식을 거행한 것이다. 비록 경찰의 제지로 이를 마무리하지는 못했으나 대중들에게 실천하는 모습을 선보였고, 결국 국가가 이를 막았기에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대지미술 작품 ‘현상에서 흔적으로’를 발표했으며 국제현대음악제를 기획해 해프닝을 선보이는 등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범위의 활동을 선보였다.

‘제4집단’ 사건 이후 경찰이 지속적으로 그를 쫓아다녔기에 일본으로 출국했으며, 1970년대에는 판화의 다양한 기법을 섭렵하고 다양한 국제전시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수의 무대미술 작업도 진행했다. 또한 그는 페인팅 작업도 다수 진행 중이다. 그의 ‘음, 양’ 연작은 콜라주 기법을 도입해 이미지와 그림을 병치시키고 서로 다른 것을 혼합해 표현했다. 미술의 경향이나 장르라는 말로 김구림을 규정할 수는 없다. 그는 온 세상을 그의 미술재료로 다뤄왔다.

‘현상에서 흔적으로’, 사진, 99×148cm, 1970(2000 인화).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아방가르디스트=앞서 언급했듯, 김구림은 말 그대로 번뜩이는 미술을 선보였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대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김구림의 작품들을 직조하는 미학적 키워드는 바로 ‘시간’이다. 모든 사람들은 공평하게 같은 시간의 선상에 놓여있다. 김구림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공평한 시간을 가시화시키고 체현시키는 작품들을 많이 했다. 그의 실험영화와 해프닝, 설치미술 작품들이 바로 이를 대표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실험영화와 시간차를 두고 사람들에게 발송하지만 같은 행위가 적힌 편지라는 형식 그리고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작품 역시 불타는 잔디밭을 조성하고 이후 다시 푸른 잎이 자라 이를 뒤덮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대형 얼음에 붉은 천을 씌워서 전시기간 내내 녹아가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관람하지 않는 이상 정형화된 같은 작품을 지켜볼 수 없기에 이들 작품에 대한 감상 역시 모두 다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구현이 어려웠지만 경복궁 미술관을 흰 천으로 감싸는 작업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이를 설치해 거대한 흰 천에 각종 기후조건과 도시의 매연 등으로 흰 천이 변색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오늘날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회자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4집단’의 해프닝 역시 시간에 기인한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육교 위에 풍선을 설치해 지나가는 이들이 이를 터트려야 하는 행위 역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행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작품의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들과 관계를 맺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김구림은 시대의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느낀 바를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도시의 대중들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는 작품으로 선보였다. 비약적인 발전과정을 거친 우리나라의 시대적 상황과 비교해 고찰해보면, 그의 작품이 지닌 광대한 운신의 폭은 당연한 듯 보이기도 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