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의 죽음을 바라봤고 박제했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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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비둘기의 죽음을 바라봤고 박제했던 ‘트라우마’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비둘기 발을 그리다…피카소와 비둘기㊤

기사입력2021-10-20 12:12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피카소와 비둘기㊤]“파블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작업실 뒤편에 있는 나무에 가보아라.” 루이스는 여섯 살 된 아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의 그림 실력이 궁금했다. 그가 그림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네, 아빠. 가서 나무를 그려오면 되는 건가요? 나무라면 자신 있어요.” 루이스는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나무 밑에 죽어 있는 비둘기의 발을 그려 오너라.” “비둘기의 발이요? 네, 아빠.”

어린 피카소는 그리는 거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1시간 즈음 지났을 무렵, 피카소는 도화지에 비둘기의 발을 그려왔다. 천재 예술가 파블로 피카소가 어린 시절 그린 비둘기의 발은 어땠을까? 미술 천재니까 처음부터 아주 잘 그리지 않았을까?

◇죽은 비둘기와 박제=피카소의 아버지 돈 호세 루이스(Don José Ruiz Y Blasco)는 미술교사이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는데 새 그림을 즐겨 그렸다. 특히 비둘기를 자주 그렸다. 아들에게 비둘기를 그리게 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비둘기와 함께 있는 피카소, 프랑스 파리, 1945, Photo by James Lord. <출처=www.hkv.hr>

그는 어린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파블로, 이건 죽은 새의 발이라고 할 수 없잖니.” 이 말에 피카소는 당황했다. “저는 죽은 느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처럼 그려보고 싶었어요.” “파블로, 보이는 대로 그려야지.”

어린 피카소는 다음날 다시 나무 밑에 가서 죽은 비둘기의 발을 다시 그렸다. “이건 죽어 있는 빛깔이 아니잖니.” 루이스는 이 그림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말했다. 여섯 살밖에 안 된 피카소는 아빠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나무 밑에 가서 비둘기의 발을 그렸다.

죽은 비둘기는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피카소는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담고 싶어서, 죽은 비둘기의 발을 그리고, 또 그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자기 아들이 그려온 비둘기의 발에 대해 잘 그렸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려서는 안 된다며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어린 피카소는 비둘기의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며칠이고 비둘기의 발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는 비둘기의 발을 수십 번 반복해 그렸다.

여섯 살 무렵부터 피카소는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그림도 그리고, 아버지의 일도 도왔다. 아버지 루이스는 비둘기를 잘 관찰하기 위해 죽은 비둘기의 내장을 꺼낸 후 박제하는 일도 했다. 어린 피카소는 아버지가 박제하는 일을 함께 거들었다. 아버지가 박제된 비둘기를 편하게 그릴 수 있도록, 죽은 비둘기의 발에 못을 박아 고정하는 일을 자주 했다. 루이스는 어린 피카소에게 이런 일을 수도 없이 시켰다.

‘세계평화회의’ 홍보 포스터, 1949. 1949년 4월20일부터 23일까지 파리 프레이 홀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리는 포스터다. 피카소가 석판화로 찍은 흰색 비둘기가 포스터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다.<출처=www.galerie123.com>

루이스는 틈틈이 피카소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주로 죽은 비둘기의 몸체나 다리를 놓고 그리게 했다. 아버지의 냉정한 평가에도 피카소는 기죽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그림 솜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어느 순간 아버지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피카소는 아버지를 돕던 시절 악몽을 자주 꿨다. 사람들의 절단된 팔다리가 여기저기 보이고, 그 팔다리가 부풀어 올라 어마어마하게 커지거나 갑자기 아주 조그맣게 쪼그라드는 악몽이었다.

어린 시절 접했던 비둘기는 그에게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돕기 위해 죽은 비둘기를 너무 많이 보고, 자주 만졌던 것이다. 죽은 비둘기를 박제하면서 두려움과 잔인함이라는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이 된 피카소는 아버지의 그림을 회상하면서 “아버지가 그리는 그 수많은 비둘기… 수백 마리, 아니 수천 마리가 빽빽이 한 장에 들어 있는 그 그림들”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루이스가 그린 그림 중 그림에 비둘기가 수백 마리, 수천 마리가 등장하기는커녕 많아 봐야 고작 아홉 마리 정도였다. 비둘기의 죽음을 바라봤던 것과 박제를 했던 행위는 피카소에게 트라우마(trauma, 정신적 충격)로 남아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