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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차가운 회색빛 돌덩어리…태양 빛 빌려 분칠한 얼굴
Life is pain.ting #58. 위선의 달
- 기사입력2022-10-05 09:24
김윤아 작가 (bombbi0401@naver.com)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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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는 기다란 복도를 따라 각각의 스튜디오들이 마주보고 있다. 밤이면 복도의 불이 꺼지는 바람에 스튜디오 밖을 나설 때면 종종 폰으로 라이트를 켜고 문 밖을 나선다. 레지던시는 곧 릴레이 개인전(입주작가들 개인전)이 시작되고, 그 때문인지 외부에서 서로를 마주치는 일이 극히 드물어졌다. 스튜디오 안에서 작업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지속된다면 환상적이겠지만, 그런 일은 아마도 마른날 번개 맞을 확률보다도 적다. 가을은 성큼 다가왔고, 각각의 스튜디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적막을 간간이 깨뜨리는 복도에 나서면 어쩐지 조금 쓸쓸해진다. 계절 탓일지도 모른다.
그 날은 스튜디오 환기도 시킬 겸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밤공기도 좋은 듯 해서 야간산책을 나서려는데 제일 먼저 릴레이 개인전을 여는 작가를 복도에서 마주쳤다. 잠깐 열린 스튜디오의 문에서 복도로 쏟아지는 역광이 사람의 실루엣만 비춰서 얼굴은 검게 보인다. 그 검은 얼굴이 반가웠다.
“어디가세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야간산책을 가려 한다고 하니, 그녀가 자기도 폴리 뜨고 나서 공기 환기 좀 시킬 겸 나서는 길이라 한다.
자연스럽게 함께 레지던시 근방을 크게 돌며 작업에 대한 이야기나 이런저런 사적 대화들을 하다가, 우리는 레지던시 건물 앞 계단에 털썩 앉아 산책 중간 편의점에서 야간작업을 위해 사온 캔커피를 땄다. 아마 하루 이틀 더 지나면 완전히 동그란 모양이 될, 원형에는 조금 부족한 달이 건너편 아파트 사이로 얼굴을 드러냈다.
우리는 잠시 원형에서 조금 부족한 그것을 함께 바라보았다. 침묵을 깨고 그녀는 이번 전시에 대한 이야기와, 몇몇 작업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과 고민들을 이야기 한다. 이 곳 레지던시에서 유일한 이십대인, 최연소 작가인 그녀는 매우 단단한 이미지인데, 아마도 그녀와 나 사이의 나이차이 때문인지, 마음 편히 작가로서 겪는 혹은 종종 놓이게 되는 딜레마에 대해 툭툭 털어놓는다.
최근 이슈였던 프리즈와 키아프 관련 소식과 각종 뉴스들, 몇몇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글들을 읽어 내려가며 들었던 생각들, 현실에 대한 좌표, 시장과 예술, 비즈니스, 작가와 권력, 카르텔, 잘 나간다는 기획자, 잘 나간다는 갤러리 그리고 이번 전시에 들어간 재료 값, 치사했던 아르바이트 비용, 어머니의 염려, 자식으로서의 염치, 동료들의 취업소식, 작가로서의 욕망과 당장의 현실, 레지던시 이후의 계획 등등.
사실, 나라고 별 다른 말을 해줄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 해 줄 수 있는 거라고는 말을 끊지 않고 중간중간 듣고 있다는 ‘저런’, ‘아이고’, ‘그랬구나’ 등등의 추임새만 간간이 넣으며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왜 나라고 그러한 생각들이 없겠나. 다만 그러한 모든 상념들을 가지고 지금 당장 치러야 할 개인전에 몰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당장은 작업 말고는 아무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게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그녀와 그렇게 야간 산책을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을 이어갔다.
곧 추석이고, 11월 개인전에 들어갈 작업에 흐름을 끊지 않고 내달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던 나는 차 막히는 도로를 뚫고 집에 다녀올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경험상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고였고, 엄마에게는 일찌감치 연락을 해서 명절 기간이 지나서 가겠다고 말해 두었다. 텅빈 레지던시에서 혼자 밤새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작업하는 맛도 나쁘지 않고, 외려 좋아하는 편에 가까웠던 나는 연휴 기간 동안 작업실에서 해 먹을거리들을 간소하게 장을 봐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명절 당일 레지던시 주차장은 예상대로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한가롭게 주차를 하고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블라인드를 내리고 음악을 크게 틀었다. 전화기는 방해금지 모드로 바꾸었다. 실상 여기저기 연락이 많이 오는 사람도 아니지만(외려 그 반대에 가깝다), 명절 때면 복붙으로 보내는 게 뻔한 명절 관련 메시지 알람에 구태여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이 공간 외에는 우주에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는 것처럼 외부와 차단을 시키고 진행하던 작업을 한동안 바라보다 작업을 이어갔고, 중간 중간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냉장고에 미리 채워둔 요깃거리를 허기가 질 때면 꺼내 먹었다. 그러다 밤이 깊어서야 허리도 좀 펼 겸 소파에 눌러 앉아 전화기를 확인했더니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다.
보름달이 환히 떴으니 소원을 비는 걸 잊지 말라는 말. 무심히 메시지를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전 덜 채워진 달은 완벽하게 원형으로 꽉 차올라 있었고, 여전히 아파트 사이로 빛나는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위선적이다. 실상 차가운 회색빛 돌덩어리 주제에, 태양의 빛을 빌려 따듯하게 분칠한 저 얼굴이 오늘따라 위선적으로 보인다. 소원 접수 창구가 바쁠 달 위에 소원 몇 개를 구태여 나도 얹어 볼까 하다가 ‘무슨…’ 하고 몸을 돌려 건물을 바라봤다.
불 꺼진 회색 건물은 마치 숨 쉬기를 멈춘지 오래된 혹등고래 같다. 이 곳은 누구의 빛을 빌려 분칠한 얼굴인 척 하고 있던 걸까.
스튜디오에 들어가 자동차 키를 들고 나와 뒤늦게 고속도로로 오른 나는 지각생이 된 기분이다. 아직 창을 밝히고 있을 곳으로 달리면서 달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달은. 위선적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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