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시간 쓴 작품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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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마음과 시간 쓴 작품을 긴 호흡으로 바라보며 박현진 개인전 ‘해피 벌룬 데이’…현진이에게

기사입력2023-02-05 1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전날 눈이 온 터라 공기는 아주 차갑고 축축했어. 오랫동안 네가 준비한 작품을 보러 가는 일이 긴장됐던 것 같아. 네가 어떤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려 했는지 궁금했어. 네 전시의 제목은 ‘해피 벌룬 데이(박현진 개인전, 2022.12.16.~12.31, 의외의 조합)’. 나는 이 제목이 조금 수상하다고 생각했어. ‘Happy Birthday’라는 말에서, ‘Birth(탄생)’가 ‘Balloon(풍선)’으로 바뀌어 있었지. ‘행복한 생일’ 혹은 ‘생일 축하해’라는 말이 ‘행복한 풍선의 날’이 되어 있었어. ‘해피 벌룬 데이’, 네가 이 제목을 고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

전시장에 가까워지니 어둑한 바깥과 다르게 환히 빛나는 곳이 눈에 들어왔어. 전시를 열면 꼭 편지를 써 달라고 한 말이 기억나서, 그 시간을 마음에 꼭 새기고 와야겠다고 다짐했어. 글을 핑계로 네가 홀로 고민한 시간의 자리에 누워보며 몇 마디를 얹어 보내려 해.

박현진, ‘하나 그리고 둘’, 2022, 싱글 채널 비디오, 6분4초, ‘해피 벌룬 데이(Happy Balloon Day)’ 전경. <이미지=작가 제공, 사진= 고정균>

전시장에 들어서서 내가 처음 보게 된 건 모래 더미였어. 구불구불한 능선을 그리며 바닥에 흩어진 모래알의 모음. 모래 더미는 또렷한 형상을 그리고 있지 않았어. 그렇지만 무엇을 나타내려는지 알 것 같았어. 구불거리는 모래 산이 어떤 것의 등허리 같다고 느껴져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춰 봤어. 쓰다듬으면 흩어져버릴 테니 흩어지지 않길 바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길을 걸어온 발자국 때문에 지저분하게 젖어가는 전시장 바닥이 신경 쓰였어.

그런 다음 나는 자리에서 몇 발짝 떨어진 작은 방으로 이끌리듯 들어갔어. 누워있는 두 사람의 몸과 복슬복슬한 하나의 몸이 보였어. 네 친구와 너의 몸, 그리고 네 반려견 뽀뽀의 몸이 푹신한 실 위에 누워있었어. 연인(戀人)이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게, 네가 찍은 영상 속에는 두 사람과 또 하나의 존재가 함께 서로의 생을 확인하고 있었어.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박동을 들어보려 한 기억이 났어. 왜 사람들이 누군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지 질문해본 적 있었어?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쿵쿵대고 쉭쉭 거리는 소리. 음악이라 말하기에 부족하고, 소리라 말하기엔 너무 작은 속삭임. 혈관을 통해 피가 순환하며 발생하는 리듬. 너는 박동이라 말하지만, 나에게는 소리와 신호에 가까운 것. 자꾸만 달아나려 하는 것이 내 옆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말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고,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일과 네 작품에 등장하는 세 존재가 서로의 맥박을 확인하는 일은 아마 무척 다를 거야. 이 확인은 연인의 속삭임보다 더 깊고 광활한 마음을 머무르게 했을 거야.

반대편 방 벽면에는 환한 노란 페인트가 발려있고, 여러 점의 사진이 방안을 빙 두르며 설치돼 있었지. 유리판 위에 출력된 사진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장면을 볼 수 있었어. 사진에는 뽀뽀의 모습과 뽀뽀와 똑 닮은 풍선 개의 모습이 찍혀 있었어. 너는 가느다란 실로 풍선 개와 뽀뽀의 몸을 연결했어. 풍선 개는 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실을 타고 전달되는 떨림을 통해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을 거라 추측해. 뽀뽀는 몸이 아프고 늙어가며 기침하거나 숨 쉴 때만 움직였다고 했지. 생에서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몸. 희미하고 여윈 친구와 풍선을 이어 움직임을 나눠 주려 했던 그 마음을 내가 어떻게 다 헤아려 볼 수 있을까. 생이 없는 것에 생을 나르는 일. 노란 방 안에서 나는 그 기록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요즘 나는 ‘애완(愛玩)’과 ‘반려(伴侶)’라는 단어에 대해 많이 생각해. 애완은 무언가를 좋아하고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긴다는 뜻을 가지고, 반려는 누군가의 짝이 되는 동무를 뜻한다고 해. 요새는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우리는 애완동물이라는 말로 우리의 가족이자 친구를 부르곤 했지. ‘애완’은 말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축소해. 너는 뽀뽀와 14년8개월을 함께 보냈다고 했잖아. 오랜 기간 너와 함께한 뽀뽀를 단지 ‘애완견’이라 말할 수 있을까?

박현진, ‘해피 벌룬 데이’, 2022, 유리에 디지털 프린트, 각 40×60cm.

나 역시 오랜 기간 함께한 친구들을 잃어본 적 있어. 나 대신 내 가족을 지켜주던….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너는 내가 만드는 작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지. 나는 그 말이 반갑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어. 누구도 상실로부터 달아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거야. 네 슬픔의 깊이를 내가 당연히 헤아릴 수 없고, 내 슬픔을 이해해 달라 네게 말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나는 어떤 상실이나 단절로부터 시작된 그리움이 다시 삶을 이어낸다고 믿고 싶어. 생의 저편으로 가버린 것들을 떠올리는 일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그리고 떠난 것들을 잊지 않고 그리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말하고 싶어. 함께한 시간을 새롭게 쓰는 일. 그 시간을 조심히 다루며 다른 모양으로 바꾸는 일. 작가가 얼마나 소중한 일을 하는지 말하고 싶어. 네가 전시를 준비하며 홀로 보낸 시간이 허망하거나 헛되지 않은 시간이라 말해주고 싶어.

이 편지는 전시를 보고 온 날로부터 아주 조금씩 천천히 쓰였다는 말을 함께 전해. 글을 쓰는 시간 동안 너 없이 너와 대화할 수 있었어. 여전히 나는 네 작품에 관해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답을 듣지 못해 미처 쓰지 못한 이야기도 많아. 그렇지만 그 질문을 미뤄둘까 해. 마음과 시간을 깊게 쓴 작품을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 싶어. 다급히 판단하기보다 지지와 믿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해피 벌룬 데이 박현진. 한 전시가 끝났으니 네가 들려줄 다른 이야기를 고대하며 편지를 마칠게.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