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데이터 보이지 않는다면, 우린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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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우리 데이터 보이지 않는다면, 우린 존재하는가” 흐릴지 몰라도, 존재론적으로는 더욱 뚜렷한 회화…이나하 작가

기사입력2023-11-01 14:50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미디어 이론가 존 체니-리폴드는 데카르트의 오래된 금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데이터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존재하는가?”

네트워크화된 사회는 모든 정보를 데이터화한다. SNS를 들어갈 때마다 시야를 가로 막는 맞춤형 광고를 떠올려 보자. 광고는 우리가 인터넷에서 방문한 페이지, 혹은 관심을 보인 대상을 바탕으로 제시된다. 맞춤형 광고의 알고리즘은 인터넷 사용자의 정체성을 데이터화해 분류한다.

예컨대 ‘30대 한국인 남성’인 ‘나’는 ‘30대’, ‘한국인’, ‘남성’이라는 각각의 데이터로 나눠진다. 경험과 몸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측정과 분류가 가능한 ‘나’만이 데이터로 기능할 수 있다.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셈이다. ‘맞춤형’ 광고를 위해서.

‘2017060216055185291_1.jpg, 100%(뒤돌아 걸어가는 여자, 뒤돌아서 옆을 돌아보는 여자, 대각선으로 서 있는 여자, 대각선으로 서서 오른쪽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있는 여자)’, 캔버스에 아크릴릭, 286.6×726.8cm, 2018, 리사이즈 회화 연작. (사진=김경태)

이는 이미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포토샵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산된다. 3D 소프트웨어에서는 하나의 대상을 모든 각도를 통해 볼 수 있다. 이 전능한 눈은 인간의 눈과는 다르다.

영화학자 셰인 덴슨은 이와 같은 디지털 이미지를 가리켜 ‘탈상관주의적 이미지’라고 말했다. 여기서 ‘탈상관주의적’이란, 오류를 감수하고 설명하자면, 인간적 사유와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는 이미지의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인간은 인간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나하는 이처럼 균열이 난 세계에 다가선다. 작가는 2017년 경부터 ‘리사이즈 회화’라는 이름이 붙은 연작을 제작해왔다. 크기가 같은 사각형 격자가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배열된 모습은 언뜻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4900가지 색’이나 엘즈워스 켈리의 ‘스펙트럼’ 연작과 같은 역사적 회화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위의 회화들이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색 그 자체’를 제시하고자 했다면, 이나하의 회화에는 모종의 의도가 존재했다. 작가는 네트워크화된 사회에서 이미지가 유통되는 과정을 회화의 방식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이나하는 인터넷을 떠도는 여성 이미지를 수집했고, 그것을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픽셀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픽셀 이미지를 회화로 옮겨 그렸고, 그 결과 해상도가 낮은 디지털 이미지를 지나치게 크게 확대한 듯한 불완전한 이미지가 완성됐다. 픽셀처럼 묘사된 회화는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대상화해 응시하려는 불특정 인터넷 사용자들의 욕망이, 사실은 이미지를 향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0과 1로 이루어진 공허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2017년 1월 28일 여수에서 아빠’, 캔버스에 아크릴릭, 22.7×15.8cm, 2023, 초상-풍경 연작. (사진=고정균)

작가는 2023년 ‘초상-풍경’ 연작을 발표했다. 작가 본인의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누군가의 사진을 회화로 옮겨낸 작업이었다. 분명 누군가의 초상이 담긴 사진이었건만, 회화에서는 도무지 인간의 형태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곳에 있는 건 덩어리지고 얼룩진 정체 모를 형상이었다. 이것은 타당한 묘사였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디지털화된 이미지로, 경험과 정서 등이 빠져나간 ‘탈상관주의적 이미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초상이지만 초상이 될 수 없는 이 추상적 회화들에게선 짐짓 공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리사이즈 회화’ 연작과 ‘초상-풍경’ 연작을 비교하면 달리 보이는 것이 있었다. ‘리사이즈 회화’ 연작에서 칸칸이 나뉘었던 픽셀 간의 경계는 ‘초상-풍경’ 연작에서 작가 본인의 붓질을 따라 뭉개지고, 또 일그러졌으며, 이처럼 섞이되 섞이지 않는 형태로 구현되어 있었다. ‘리사이즈 회화’가 픽셀과 픽셀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디지털 환경 특유의 이산적(離散的, 서로 단절된) 구조를 표현했다면, ‘초상-풍경’ 연작에서는 바로 그 ‘사이’가 작가의 붓질을 따라 메워져 있었다.

‘초상-풍경’ 연작에는 그 누구의 초상도 없다. 그렇지만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면 그것이 누구를 찍은 사진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초상화를 그리며, 사진을 촬영하던 그때에 느꼈던 기억을 덧그렸을 것이다. 그것은 데이터로 채집될 수 없고 컴퓨터로 계산될 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며 또 기억이었을 것이다. 스마트폰 사진이 촬영되는 대상의 존재를 0과 1로 이루어진 공허 속으로 날려 보낸다면, ‘초상-풍경’ 연작은 회화를 이용해 그 공허를 건너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