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건드려보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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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한 번 건드려보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해진다 유정민 작가의 개인전 ‘그림과 조각’

기사입력2024-10-24 11:48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유정민 ‘그림과 조각’(2024) 전시 전경.

유정민의 개인전 ‘그림과 조각’(2024)에는, 제목과 다르게, 그림 혹은 조각이라고 여길 만한 것이 없었다. 전시장은 그림과 조각이 아닌, 소품이라든가 장난감이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북적였다. 차라리 이것을 잡동사니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인형, 장난감, 피규어, 키링, 미니어처, 낙서 같은 그림들, 담요에 매달린 배지, 솔방울과 나뭇가지. 심지어 전시장에는 기차가 있었다. 움직이는 기차가.

이처럼 혼란스럽고 흥미로운 수집 목록에 이름을 붙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작가는 어째서 “그림과 조각”이라는 이름을 붙인 걸까? 그의 말을 들어보면, 궁금증이 가실 지도 모른다. 유정민에게 이들은 일상과 미술 사이, 어느 경계에 위치한 사물이다. 그리고 경계란 아슬아슬하고 얇은 것이라서, 조금만 건드리면 무너질 듯한 무엇이었다. 유정민은 마음에 든 사물을 갖가지 방법으로 꾸미고 가공해서(작가의 말을 따르자면, ‘괴롭혀서’) 전시장 안에 들여온다. ‘미술이 뭐길래 이 아이들보다 낫다는 거지?’ 되물으며, 일상과 미술의 사이에 놓인 모종의 경계에 시비를 건다.

유정민의 작업을 슈퍼플랫이라든가, 오타쿠 미학이라든가, 서브컬처라든가, 그런 말로 가리킬 수도 있을 테다. 전시장에 놓인 수집품을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여러 물건들 사이에 슈퍼플랫을 대표하는 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카이카이 키키’ 인형이 놓여 있으므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작가의 접근은 서브컬처를 전유한 기왕의 현대미술과는 달라 보였다. 일본의 사상가 오모타 이누히코는 ‘카와이(可愛い, 귀엽다)’라는 형용사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브컬처 미학을 고찰한 적 있다. 그는 ‘카와이’한 것, 귀여운 것은 ‘그로테스크’한 것, 징그럽고 기이한 것과 가깝게 이웃해 있다고 보았다. 양자 사이에는 아주 얇은 막이 있을 뿐인데, 어떠한 우연에 의해 막이 파손되면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약하고 우습게만 보였던 귀여운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위협할 만큼 기이한 타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유정민 ‘그림과 조각’(2024) 작품 부분.

서브컬처를 소재 삼은 미술은 예의 ‘얇은 막’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귀여운 것이 감추고 있는 기이함을 증폭시키고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나 유정민의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 그는 작고 귀엽고 그래서 기이한 것들을 꾸미고, 입히고, 보살피면서, 가속시킨다. 귀여운 것과 기이한 것의 이분법을 유지하는 대신, 둘 모두를 증폭시킨다. 그럼으로써 귀여운 것과 기이한 것 사이의 ‘얇은 막’이라는 게 실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미술이라는 제도적 예술의 수법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을지 모를 튼튼한 것인지 보여준다.

‘그림과 조각’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전시장 곳곳에 작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것들 사이에 더 작은 것들이 겹쳐 있었다. 이토록 작은 것을 가꾸고 만지는 작가의 손길을 상상하며, 전시장 안을 뱅글뱅글 배회하는 기차를 보고 있으면, 그림과 조각 같은 건 정말로 별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장난감을 사용하는 놀이가 과거 언젠가 성스러웠던 종교 제의로부터 비롯한 것이라고 보았다. 놀이를 통하여 인간은 종교적인 것을 세속화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이때 장난감은 ‘한때’와 ‘더 이상은 아닌’이라는 이중적 시간 사이에서, 순수하게 분화하며 존재하는 ‘틈’의 시간성을 현전시킨다. 장난감은 사라져 버린 성스러운 시간을 놀이하는 시간 속에서 자유롭게 현전시키며, 성스러운 것이 도래할지 모르는 이중의 시간성을 현실화한다.

시간이니 현전이니 하는 단어는 유정민의 전시 앞에서 무겁게만 느껴진다. 작가는 무언가 혁명적인 도약을 시도하기보다는, 수집가의 집요함과 애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며 경계를 한번 건드려본다. 전시를 보며 알 수 있게 된 건 이런 것이다. ‘얇은 막’을 부수려고 하지 않아도, 괜히 위악적인 기이함을 과시하지 않아도, 한 번 건드려보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해진다는 사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