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거나 기록하는’ 행위, 삶을 바꿀 힘을 가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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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바라보거나 기록하는’ 행위, 삶을 바꿀 힘을 가질까요 어떤 편지…요나스 메카스의 유작 ‘레퀴엠(REQUIEM, 2019)’

기사입력2024-10-31 09:36

박선호 기자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얼마 전 흥미로운 영화를 봤다. 재미있는 영화가 아닌 ‘흥미로운’ 영화를. 리투아니아 태생의 저명한 감독이자 작가인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1922~2019)의 유작 ‘레퀴엠(REQUIEM, 2019)’이었다.

2017년 어느 미술관에서 그의 작업과 마주쳤었다. 커다란 전시실에 여러 대의 작은 모니터가 빙 둘려 설치돼 있었고, 그 뒤에는 정체 모를 아름다운 장면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정체를 모르겠는 것. 수상하거나 의심스럽다기보다 낯설지만, 아름다운 미상의 것이 담긴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일상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배경이 되는 장소가 어디인지 몰랐지만, 한 사람의 생을 한꺼번에 돌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의 눈동자에 어린 빛, 겨울에 흩날리는 눈송이, 미풍에 흔들리는 옷깃, 어린아이와 어른의 모습,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 움직이는 트럭 따위가 기억난다.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그의 마지막 영화를 통해서도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게 될 거라 예상했다. 영화는 기대를 배반했고, 첫 30분간은 지루하다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영화를 본 경험을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결심했다. 틈틈이 감독의 전작을 살펴보고 그의 회고전 도록이나 그의 작품에 관한 연구를 찾아서 읽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저는 우리가 기억과 사고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현실, 즉 물리적으로 현실이라고 믿어요. 작업 재료이기도 하지요. 기억은 내 주변의 모든 작품 못지않게 물질이에요”라고 말했다.

요나스 메카스, 레퀴엠(REQUIEM), 2019, 84분, 스틸 이미지.<이미지 제공 및 출처=CURA Magazine 및 Zuecca Projects(www.zueccaprojects.org/project/jonas-mekas-requiem/>

기억은 원래 만질 수가 없는데, 기억을 물리적인 현실처럼 여기고 그것들을 조직하는 메카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일반적인 영화와 다르게, ‘레퀴엠’에서는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조연, 특수효과도 없다. 영화의 재료는 30여 년의 시간 동안 메카스가 직접 찍은 장면을 80분 분량으로 엮은 것으로, 한 장면이 1분이 채 되지 않는 클립도 여러 개 있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아닌 30년간 조금씩 찍은 것을 엮은 거다. 그 꾸준함을 상상해 본다면 가히 놀라울 정도다.

깜깜한 극장에 다종다기한 꽃, 나뭇잎, 들판이나 유적지를 포착한 이미지가 영사되며, 꽃잎을 만지며 아이처럼 기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중간중간 TV나 신문을 통해 보여지는 재해와 재난의 모습,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비춘다. 특별한 것 없는 일상 사이로 불쑥 솟아오르는 비극은 생의 연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개 책자에는 “감독은 마치 지구에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지난 삼십 년 동안 직접 기록한 자연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스크린에 옮긴다”라고 쓰여 있었다.

소셜 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스타그램 스토리, 유튜브, 틱톡 등의 플랫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한다. 촬영하는 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들여다보고 편집한다. 필터를 적용하거나 자막을 추가해 그것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매만진다. 플랫폼 속의 쏟아져 내리는 영상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요나스 메카스가 ‘그저 바라보는 일’을 통해 나에게 일깨워준 힘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의 영화에 관해 알아보며 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를 짧게 다듬어 여기로 옮겨본다.

“안녕하세요. 귀사에서 배급한 요나스 메카스 감독님의 영화 스틸 이미지 자료를 요청드리기 위해 연락드립니다. 지난달 우연히 감독님의 영화 ‘레퀴엠’을 보았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 80분 가까이 자연의 이미지들이 큰 화면에 투영되는 장면을 보는 경험은 저에게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길가에 핀 꽃들을 매일같이 바라보고 담아낸 감독님의 행위는 일상의 행위를 통해 혁명을 꿈꿨던 상황주의자(Situationist International)의 실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저 바라보거나 기록하는’ 행위가 삶을 바꿀 힘을 가질 수 있을까요? (...)”…박선호 드림.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