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바람에도 가볍게 떨구기 시작한 꽃잎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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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작은 바람에도 가볍게 떨구기 시작한 꽃잎들 Life is pain.ting #41. 목련

기사입력2021-05-06 17:06

김윤아 작가 (bombbi040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세달 가까이 진행되는 기간 때문에 넉넉히 시간을 잡아 지난 3월 마지막 주에 선배의 전시장으로 향했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은 오랜만이었다. 대구와 부산, 김해에서 레지던시 생활을 했었던 터라 남쪽이 일찍 꽃이 터진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회색 풍경을 지나 달아빠지게 터져나간 꽃들의 향연을 느닷없이 만나니 정신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방문 일정을, 진주에서 진행 중이던 개인전 철수 일정과 맞춰서 잡았기 때문에 촬영 및 철수를 도와줄 동료 작가 두명, 그리고 선배 전시에 같이 방문하기로 했던 공간 대표까지 다섯명이 시간을 잡아야 했기 때문에 다소 어렵게 시간을 맞춰야 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선배가 일정을 잡은 날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 긴 전시기간 동안 찾아오는 지인들과의 이어지는 자리들 때문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라 짐작한 나는 알아서 보고 가겠다고 답변을 했다. “멀리서 아끼는 후배가 오는데 내가 즐거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거 같다. 내 다소 안 좋아도 개안겠나”라는 답변이 이어서 오고 나서야 나는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인지 감을 잡기도 어려웠고, 원체 엉뚱한 답변으로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어 진인지 농인지 알기 위해선 전화를 걸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선배는 첫 번째는 수화음을 끊어놓더니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받았다.

울음소리라는 건 이상한 교감능력이 있다.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번쯤은 홀로 크게 울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수년을 알고 지냈지만, 선배가 우는 걸 본 적은 처음이다. 아니, 울음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교감이지만, 충분히 먹먹한 가슴을 안고 주저앉은 작업실 공간이 피부에 닿을 듯 느껴졌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울음소리와 침묵을 깨고 선배가 말했다.

“… 애끼던 동생이 죽어삣다.”

그 애끼던 동생이라는 분은 오랜 세월 작업을 해오던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는 중년작가다. 누군가의 자살. 이 익숙하고 불편한 소식은 기실 처음 본 얼굴처럼 낯설진 않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혹은 주변에서 간간히 듣고, 보게 되는 게 현실이다. 실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정치·사회·경제 이슈를 떠나 사랑도, 죽음도, 누군가의 사생활도 끊임없이 소비되는 삶에 우리는 좋든 싫든 어느 정도는 젖어 있기 때문이다. 숨이 턱턱 차오르는 달리기가 끝나면 아이스아메리카노든, 콜드부르든 의식하지 않아도 이제 몸이 먼저 찾게 되는 것처럼.

<사진제공=김윤아 작가>

여하튼 내게도 소중한 동료작가를 그렇게 떠나보낸 기억이 있다. 굉장히 지리멸렬한 이야기다. 그녀는 몇 점의 작업을 남겼고, 맥주 세병을 마시고 한참 벚꽃이 터지는 계절에 숨통을 끊어냈다. 이러한 슬픔들은 오래전에 누군가 바닥에 콜라를 쏟고 대충 마른걸레로 닦아내길 반복한 것처럼 시간을 두고 납작하고 끈적하게 달라붙어 간다.

그런데 슬픔을 차치하고 나면 남겨진 유작들에 대한 처우가 늘 의문점으로 남는다.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보통은 남겨진 가족들이 유작에 대한 권한을 갖고 처리하기 마련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유작들을 정리해주는 시스템은 없다.

계약관계가 있는 작가나 시장에서 검증된 작가의 작품이라면 모를까, 소장처를 찾는 일도 만만치 않을 일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시대는 달라졌고, 독거인들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갈수록 고독사의 비율은 높아질 거라 전망된지 오래다. 그에 따라 몇몇 나라에서는 독거인들의 사후 비용처리 문제에 책임지는 시스템이 도입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작가의 죽음을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그들의 유작 처우방식이나 행방이 신경쓰이곤 했다.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반드시 미래에 당도할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리라.

선배는 늦은 오후께 작업실로 향하면서 막걸리를 두어병 사와 향을 피우고 홀로 술잔을 비워내고 있는 중이었다.

며칠 뒤 미술관 앞에서 만난 선배는 활짝 웃으면서 반겼고, 그의 전시를 둘러보곤 근방에 맛집이라고 소문난 선배의 단골집에서 커다랗게 고기쌈을 싸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남쪽은 꽃이 참 빨리도 핀다. 작은 바람에도 파리한 분홍 꽃잎들을 가볍게 떨구기 시작한 벚나무도 많았다. 2차로 건너가기 전 바람도 쐬고 고기냄새도 뺄 겸 흐드러진 목련과 벚나무 사이에 등을 기대고, 늦은 밤 빨갛게 엉덩이에 불을 켠 자동차들의 뒷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다, 애써 살피지 않던 선배의 얼굴을 마주하고 실히 웃고 있자니 며칠 전 그대로 끌어안고 고꾸라질 것 같은 시집에서의 한 구절이 포물선을 그으며 뇌리를 스친다.

꽃이 지니 몰라보겠다.

용서해라.…목련에게, 윤제림.(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