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표현과 문화적 대화의 중심에 선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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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예술적 표현과 문화적 대화의 중심에 선 ‘파랑’ ‘보이지 않았던, 신성한, 예술적인’ 파랑

기사입력2024-05-28 13:11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파랑은 신비로운 색이다.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현대인의 40% 이상이 좋아하는 색이다. 파랑은 하늘, 바다 등 위대한 자연을 대표하는 색이면서, ‘파랑새’처럼 희망과 성공을 나타낸다. 하지만 슬픔과 우울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한다. 모두 알다시피 파랑을 뜻하는 ‘블루(blue)’는 슬픔과 우울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파랑은 신석기까지도 없는 색이었다. 최초의 동굴벽화를 그렸던 전기 구석기시대의 벽화들에는 파란색이 없었다. 빨간색, 검은색, 갈색, 그리고 여러 색조의 황토색이 발견되지만, 파랑과 초록은 찾아볼 수 없다. 최초의 염색기술이 생겨나기 시작한 신석기에도 파랑은 없었다. 자연에 널리 퍼져 있는 색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파랑을 아주 뒤늦게야 찾아내고 생산했다. 파랑을 인식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없는 색’ 취급을 받았으며, 로마인에게는 미개인의 색깔로 천대받았다.

하지만 중세 이후로는 그 위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괴테가 ‘색채론’(1810)에서 “우리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매력적인 사물을 잡고 싶은 것처럼 파란색을 보고 있으면 빠져들게 된다. 그것은 파란색이 우리 쪽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느 순간 파랑을 매력적인 색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성한 파랑에서 대중적인 파랑으로=파랑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신비와 깊이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파랑을 천대했지만, 고대 이집트에서는 천상의 색으로 여겼다. 이집트에서는 청금석(lapis-lazuli) 같은 귀한 광물에서 추출한 안료로 파랑을 만들었는데, 이 때문인지 창조와 태양의 신 아문-라(Amun-Ra)를 그릴 때 사용함으로써 신성하고 영원한 속성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집트에서 파랑은 무한한 하늘과 물을 연상시켜 생명과 성장을 상징했으며, 신의 천상적이고 왕권적인 속성을 보여주는 색이었다.

제라드 데이비드(Gerard David), ‘이집트로 도피 중 휴식(The Rest on the Flight into Egypt)’, 1510년경, 패널에 유화,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소장.

이집트에서와 유사하게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파랑은 신성한 색이었다. 파랑은 중세에 천상과 하늘을 표현하는 색으로 자리 잡으면서 깊은 종교적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교회의 벽화와 성경의 삽화에서 성모 마리아를 묘사할 때, 망토를 파란색 중 하나인 ‘울트라마린(ultramarine)’으로 칠해 천상의 권위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표현했다. 눈부신 파랑은 빛나는 별빛처럼 신자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의 화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는 “울트라마린은 그 어떤 색깔보다 독보적이면서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색깔이다…. 황금과 결합한 채로 우리의 모든 작품을 장식하고 있는 이 색깔이 벽에서든지 패널에서든지 그 모든 사물로부터 빛날지니…”라며, 울트라마린을 찬미하기도 했다. 아마도 울트라마린 안료가 무척 귀했기 때문이리라.

이집트 시대에 청금석에서 파란색을 얻었듯이, 중세에도 청금석에서 울트라마린 안료를 추출했다. 그런데 청금석은 아주 귀한 광물이었기에, 여기서 추출한 울트라마린 안료는 금보다도 비쌌다. 비싼 안료였기 때문에, 작품을 그릴 때 매우 신중하게 사용되었다. 이 당시 울트라마린을 귀족과 교회에서 선호했던 것은 아마도 비싸고 귀한 안료였기 때문일 것이다. 파랑은 중세와 르네상스시대 사회에서 신비로운 힘을 시각적으로 실체화하는 색상이었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영적인 갈망과 신앙의 깊이를 울트라마린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태풍 앞에 파랑은 검정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 신교도들은 검정을 고결하고 성스럽고 존엄한 색깔로 인식했다. 성직자들은 모조리 검은색 옷을 입었고, 신교의 영향권에 있는 왕국의 군주들은 대부분 검은색 옷을 입었다.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우유 따르는 여인(The Milkmaid)’, 1660년경, 캔버스 위에 유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

산업화의 새벽을 맞이한 18세기 유럽에서 파랑은 또 다른 변혁의 파도를 타고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로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가 발견된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최초의 화학 합성안료인 프러시안 블루는 마치 불현듯 등장한 천둥처럼 예술과 과학의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 색을 최초로 합성한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하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바로 요한 디스바흐(Johann Diesbach)의 이야기다. 베를린에서 염료와 안료를 다루던 요한 디스바흐가 더 짙은 빨간색을 만들려다가 주원료 부족으로 오염된 것을 사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화학적 반응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진한 파란색의 침전물이 생성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베를린은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에 있었는데, 1709년부터 이 청색 안료가 거래되면서 ‘프로이센 블루’ 혹은 ‘베를린 블루’라고 명명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영어명인 ‘프러시안 블루’로 사용된다.

프러시안 블루의 발견은 예술의 세계를 넘어 산업과 상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파란색은 천연안료에 비해 비용이 저렴하고 생산하기 쉬워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도 용이했다. 이 때문에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직물, 인쇄, 심지어 군복의 색상으로도 사용되며 파랑의 사용 범위를 넓혔다. 이 강렬하고 깊이 있는 푸른빛인 첫 번째 인공안료로서,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배경과 맞물려 인간의 창조성과 기술적 진보를 상징한다. 이 색상은 단순한 물질을 넘어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었고, 예술가에게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이브 클랭의 브랜드가 된 파랑=20세기에 들어서 프랑스의 예술가 이브 클랭(Yves Klein)은 파랑에 대한 새로운 예술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자신만의 색상인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 IKB)’를 개발하고, 이 색상에 관한 특허를 획득한 것이다.

이브 클랭, ‘블루 비너스(Venus bleu)’, 1962/1982, 비너스 상에 파란 채색. <출처=www.galerieleu.de >

클랭은 이 독특한 파랑을 활용해 혁신적인 단색화, 조각, 그리고 퍼포먼스 아트를 제작했다. 그의 청색 작품 중에는 나체 여성을 마치 살아있는 붓처럼 사용한 파격적인 작업도 있다.

1958년 파리의 이리스 클레르 갤러리에서 열린 클랭의 전시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전시회는 ‘안정된 회화적 감수성의 비가공 원료 상태에 있는 감수성의 특수화(The Specialization of Sensibility in the Raw Material State of Stabilized Pictorial Sensibility)’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에게는 ‘더 보이드(The Void)’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클랭은 이 전시에서 관객들에게 파란색 칵테일을 제공했다. 관객은 이 음료를 마시고 나서, 하얀색으로 칠해진 캐비닛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파란색 캐노피 아래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미술사의 풍문에 따르면, 이 칵테일을 마신 관객들의 소변이 파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브 클랭은 색상의 선택을 브랜드 캠페인의 한 양상으로 생각했다. 그의 IKB 개발은 단순히 미술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 색상은 론 풀랑크(Rhȏne Poulenc)라는 제약회사에서 화학자들과의 협력을 통해 개발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학자는 클랭이 원하는 특정 색조와 질감을 구현할 수 있도록 안료와 합성수지를 혼합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이러한 협력은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기 협업의 사례로, 미술과 기술, 그리고 상업이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현대 파랑의 예술은 이브 클랭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이 강렬한 색상은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예술을 표출하게 한다. 현대작가들은 예술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란색이 가진 속성과 의미, 시각성을 탐구하면서 관객들에게 예술이 갖는 깊이와 다양성을 새롭게 드러낸다. 파랑은 단순히 색상을 넘어서 예술적 표현과 문화적 대화의 중심에 서 있으며, 현대예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