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화!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프린트

오피니언 ㅣ 칼럼 추상화!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 추상미술의 탄생과 감상

기사입력2015-02-16 10:58

(주)예술만세 객원 기자 (artmanse2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추상미술은 모더니즘의 상징이지만, 미술감상 대상으로는 가장 어려운 장르로 손꼽힌다. 아무런 형태도, 스토리도 없는 추상그림을 보고 특별한 감동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현대미술에서 추상미술은 많은 컬렉터의 주요 소장품이 되고, 천문학적 가격으로 거래된다. 이는 추상미술의 어떤 매력에 이끌려 나타나는 현상일까?

추상미술의 창시자 칸딘스키

그림은 직접적으로 향기를 맡거나 촉각적으로 만질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우리가 꽃그림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형태를 채우고 향기를 느끼게 하는 색의 영향이 크다. 실제 그림에서 색이 사라지면 수많은 명작은 그 가치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색이 표현대상에 갇혀 있는 한 색은 주인공(형태)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역할에 불과하다. 이러한 조연을 주연 역할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시도가 대상으로부터 색을 독립시킨 것이다. 색의 주연가능성(미적가치)을 발견하고 대상에 묶여있던 색을 독립시켜 색의 자유성을 극대화시켰다. 이것이 추상미술의 탄생 동인(動因)이다.

미술사에서 대상이 없이 색채의 자유로운 표현만으로도 감상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 화가는 추상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이다. 칸딘스키는 단 한 번의 우연한 체험을 통해 아름다움은 형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색으로도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 탄생 에피소드는 이미 유명하다.

“1910년 어느 날, 밖에서 일을 마친 나는 해질 무렵 내 그림만 골똘히 생각하면서 화실로 돌아왔다. 화실에 들어선 나는 안에서 비치어 나오는 광선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 신비로운 그림에서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형과 색뿐이었고 어떤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순간 나는 이 그림이 옆으로 잘못 놓인, 내가 얼마 전에 그렸던 그림인 것을 깨달았다. 다음날 나는 이러한 감동을 살려보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불가능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을 어제처럼 다시 옆으로 눕혀도 보았으나 언제나 그려진 대상만 보일 뿐, 어제의 색과 형으로만 된 황혼의 광채는 다시 보이질 않았다. 비로소 나는 내 그림속의 대상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칸딘스키 <최초의 추상화> 1910년, 종이에 수채화

1910년 추상화 탄생을 예고한 <최초의 추상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칸딘스키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시작했고, 결국 색으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믿음을 예술작품으로 표출하기 위해 끌어들인 대표적 요소가 음악이다. 색을 음악과 연결했다.

칸딘스키는 “색채는 건반이고,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이는 추상미술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음악적 선율이 담긴 색으로 전달하는데 적합한 장르이며, 화가는 그 음악적 선율의 색을 조율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끄는 지휘자로 인식한 것이다.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들으며 “나는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모든 색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라며 황혼이 물들어가는 자연 풍경을 떠올린 칸딘스키의 경험을 종합해보면, 그의 그림은 각자 음색이 다른 악기들이 만나 연주하는 교향합주라 할만하다. 심벌즈,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 드럼 등 온갖 악기들이 소리 내는 음악의 현장이다.

이것이 칸딘스키가 추상미술을 통해 추구하고자 한 세계였다면 성패를 떠나 감상자를 충분히 매료시킬 만하다. 미술작품을 보면서 음악의 선율을 떠올리거나, 음악을 들으며 미술을 감상하는 새로운 만남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본능에 충실한 내적 감정의 직관적 분출이다. <즉흥>, <인상>, <구성>으로 이어지는 시리즈는 바로 이러한 내적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한 그림들이다. 칸딘스키는 음악을 연주하듯 색의 자유로움을 거리낌 없이 쏟아냈다. 이때의 행위를 ‘내부의 명령’으로 간주했고, 예술은 ‘내부의 명령’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고 여겼다.

음악을 색으로 표현하고, 색으로 음악적 선율을 음미하려 한 도전은 무모했지만, 결과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남겼다. 러시아 변방 출신의 칸딘스키가 추상화라는 이름의 새로운 형식으로 유럽미술의 틀을 바꿔놓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추상화의 위치 견고히 다진 피카소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피카소의 역시 추상화를 통해 사물의 본질에 접근을 시도했다. 피카소가 입체파라 일컫는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의 시각적 이해를 저버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이것이 도대체 뭐지? 뭘 그린거야?” 피카소는 대꾸했다. “사람들은 새소리는 묻지 않고서도 듣기 좋아라 하면서 그림만은 왜 그토록 물으려 드는가.” 당시 아는 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피카소의 이같은 항변은 오늘날 추상미술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사람에게 유효한 답변이자 추상화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돕는데 적절하다.

파블로 피카소 <화가와 모델>, 1927년, 에칭, 19.4x28cm, 발자크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걸작>의 삽화(1931년 파리에서 앙리브루아즈 볼라르 출간)

예를 들어 <화가와 모델>은 피카소의 그림제작 과정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피카소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마리테네즈의 사실적 모습이 아니라 그림 속 캔버스에 그려진 추상화이다. 피카소가 그린 마리테네즈의 모습이 사실적 형상은 아니지만 그녀가 뜨개질 하는 손동작의 궤적을 따라 그린 것임을 아는 순간 피카소가 그린 추상화는 자신과 모델보다는 마리테네즈가 머물고 있는 공간에 주목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피카소는 모든 대상을 잘 그리는 것뿐 아니라 미처 인식하지 못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도 화가의 능력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미술사적 평가는 여러 시각에서 재평가되고 논의 되지만,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추상의 본질에 접근한 창조적 행위는 현대미술에서 추상화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추상은 대상을 단순화시키며 사물의 본질에 순수하게 다가서는 하나의 과정이자 선택이었다.

피카소는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그림을 배우는 과정의 힘겨움을 여러 차례 역설하면서도 추상이란 항상 구체적인 실재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아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라!”라며 추상화를 읽는 방법을 전수한 피카소의 노하우는 되새겨볼만 하다.

미술사에서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이었던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와 미술사의 줄기가 아닌 새로운 신종을 탄생시킨 추상미술의 창시자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보는 것에서 읽고, 느끼는 방법을 일깨워주고 미술의 표현영역을 확장시켜준 화가들이다.

21세기 현대미술에서 추상미술은 전성기 시절 거침없이 질주하던 때의 선두자리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지만, 여전히 또 다른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본질을 탐구하는 ‘추상에의 의지’를 자극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글=변종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관장, 미술평론가(jpda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