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과 소통의 폭을 넓힌 2000년대 ‘극사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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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대중과 소통의 폭을 넓힌 2000년대 ‘극사실화’ 한국 미술사의 중요한 경향으로 자리 잡아

기사입력2015-06-09 19:11

변종필 객원 기자 (jpdada@hanmail.net) ㅣ다른기사보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변종필 관장·미술평론가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시 사이에 일어난 재현의 대결은 사람의 눈을 속이는 극사실화의 원조다. 관람객의 눈을 현혹하는 화가의 손기술은 아주 오래된 미술의 특질로 21세기 한국 미술에서 주목 받은 표현장르 중 하나인 극사실화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2000년대는 이른바 디지털시대다. 1970년대 후반 극사실화가 ‘도시화’되면서 급변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인간 생활양식의 변화를 담아냈다면, 2000년대 극사실화는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컴퓨터 프린트 등 최첨단 과학기술과 맞물려 탄생한 가상현실을 담아낸다.

2000년대 한국사회는 본격적으로 소비사회와 정보화 시대를 여는 일대 변혁의 시기였다. 대중들의 문화예술 향유기회가 늘어나고, 소비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속화되면서 예술문화를 통한 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른 대중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미술 장르로 떠오른 것이 팝아트이고, 그와 동시에 극사실화가 급부상했다. 불과 몇 십 년의 시간을 두고 변화한 극사실화는 하나의 유행을 넘어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경향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늘날 사진 효과를 극대화한 많은 작품은 대중성을 확보하며 ‘극사실화의 전성시대’를 이끄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핍진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적 방법과 제작과정에서 새로운 방법을 동원해 사실성을 획득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가들의 경우 모델이나 대상을 특정한 이미지로 연출한 후 촬영하고, 인화한 사진을 보고 그리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인물사진은 모델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려고 포토샵이나 트리밍으로 감추고 싶은 부분을 숨기고, 가능한 한 멋있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를 위해 흑백과 컬러, 조명과 밝기, 노출과 감도 등 기본적 기능에서 이미 사진은 사실을 드러내기보다는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대 극사실화에서는 이러한 현대 사진의 기능적 특징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숨기기보다는 찾아낸다. 육안으로는 관찰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들춰내는 집요함으로 작품의 리얼리티를 높인다. 극사실화에서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서 슬라이드 투사기를 이용해 모티브를 캔버스에 투사하여 이미지를 복제하는 방법을 넘어 투사된 이미지를 캔버스에 인쇄한 후 실사된 이미지를 유화나 아크릴로 덧씌우는 방법으로까지 확대됐다. 또한, 여러 이미지를 재조합해 컴퓨터 스크린에서 초현실적 이미지나 새로운 조합이미지를 만든 후 그 이미지를 다시 캔버스에 실사한 후 유화나 아크릴로 덧씌우는 방법 역시 유행처럼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극사실화에서 사진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상상과 표현을 위한 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회화의 종말, 혹은 위기라는 시대적 담론을 이끌어내며 예술적 가치와 범주에 적지 않은 과제를 안겨 주었지만, 결국 사진은 현대미술에서 회화의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회화를 재창조하는 매체로써 그 역할과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극사실화의 활용에서도 볼 수 있다.

왼쪽부터 강강훈_Modern Boy-custom made breath, 김용석_The eye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0, 심윤_HEAD_캔버스에 유채_227.3×181.8cm_2013

결과적으로 2000년대 한국 극사실화는 질적 향상을 이룬 첨단매체들의 다양한 기술로 사물의 실재화를 이끌어냈다. 사물의 재질감은 물론, 중량감까지 옮겨내는 정치한 표현기술로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하는 시대를 열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사물을 실재하는, 즉 현존하는 것으로 제시해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실재효과 reality effect’를 제공한다. 사진을 대형화면으로 전사한 느낌을 주는 기술력으로 그림이 더는 그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 결과 철저한 현실복제를 통해 모방이 원본을 대신하고, 원본보다 더 뛰어난 복제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국내의 많은 극사실주의 화가 중 그 표현의 핍진성으로 볼 때 다른 작가들에 견주어 사진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작가들이 있다. 예컨대 강강훈, 김명숙, 김대연, 김성진, 박성민, 설경철, 유용상, 이지송, 최경문, 최정혁, 황순일 등은 사진적 효과를 손의 표현으로 극대화시킨 화가들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미술에서 전개되어온 극사실화에 대한 미술사적 정립과 평가는 미온적이었다. 냉정히 말한다면 1970년대 후반을 시작으로 1980년대에 활동한 극사실화 경향의 작품들은 마땅한 미술사적 명칭마저 확보하지 못했다. 한국화단에서 극사실화는 사실상 비주류에 속해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미술사적, 미학적 평가 대상에서 밀려나 있었다. 정체성과 관련해 극사실화에 대한 평가는 비판과 긍정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그에 따른 한국형 극사실화의 정체성 정립은 당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한국미술에 등장한 극사실화가 미국의 극사실주의와 분명히 다른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한국 극사실화의 미술사적 가치평가에서 중요한 사실이다. 198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과 현실 참여를 예술가의 소명으로 여긴 민중미술 작가들의 강렬한 대립 속에서 상대적으로 극사실화의 역할과 가치가 평가절하된 부분은 새로운 접근과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이러한 기본 연구가 선행될 때 2000년대 한국 극사실의 미술사적 가치와 위상정립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

2000년대 한국 극사실화가 어떤 모습으로 한국미술사에 자리매김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미술계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미술양식임을 부정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극사실주의는 단순한 모방이나 재현과는 다른 시뮬라크르를 대변한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인 시뮬라크르가 현실을 대신하고, 현실은 시뮬라크르, 즉 가상에 지배받게 되는 현상처럼 한국 극사실화는 원상이 없는 수많은 이미지를 쏟아내고 있다. 이 점에서 극사실화가 초현실성, 복사, 이미지합성 등 기계술을 활용한 손쉬운 기법에 의존해 표현이 획일화되고, 지나치게 구매자의 수준에 맞춘 상업적 미술에 집중되는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다. 사물의 기계적인 모방이나 재현에만 머무를 경우 시각적 형식에서 이룬 완결성은 있지만, 철학적 사유의 부재에서 오는 내용적 가벼움을 양산할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2000년대 한국 극사실화의 성과는 소비시대와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감각적인 회화의 유형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2000년대 극사실화가 대중과 소통 가능성의 폭을 넓히고, 손의 집약적인 노동을 통해 기술매체에 빼앗긴 예술의 가장 원초적 특성인 ‘손의 우월성’을 재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눈속임’이 미술의 한 축을 이어온 역사라는 사실에서 사실적 재현은 미술에서 축출할 수 없는 미의식이다. 그리고 궁극에는 ‘보는 것이 진실이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따라서 회화가 평면(캔버스)을 벗어나지 않는 한 회화가 지닌 고유한 특성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 기계술이 모든 것을 대체하지 못하는 한, 손에 의한 예술적 특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 점에서 극사실화는 손의 위대함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여전한 매력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