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 현대미술

프린트

오피니언 ㅣ 칼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 현대미술 배설물, 두개골, 꽃가루…‘유별난’ 미술재료의 자율성

기사입력2015-07-07 17:42

변종필 객원 기자 (jpdada@hanmail.net) ㅣ다른기사보기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변종필 관장·미술평론가

미술사를 돌이켜보면 고대로부터 조각이나 회화에 사용된 재료는 지극히 한정돼 있었다. 조소에서는 대리석, 청동, 석고, 흙이 주재료였고 회화의 주재료는 목탄, 펜, 템페라, 안료, 튜브물감 등이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혐오감을 주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재료는 사용하지 않았고, 보존성이 뛰어난 재료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는 더는 혐오감, 윤리성, 도덕성, 보존성에 대해 규제를 받지 않는다. 작가의지에 따른 결과에 주목할 뿐이다. 작품에 사용한 재료는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역할과 때로는 작품의 내용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한다. 예술의 특성이 현대에 이르러 한층 폭넓어지면서 새로움을 향한 작가들의 열망이 기발한 재료를 사용해 고정관념을 깨는 것으로 한층 확대되고 있다. 동물, 다이아몬드, 보석, 폐품, 변기, 배설물, 피, 사체, 해골, 꽃가루 등 현대미술의 창작활동에 사용되는 재료는 어떤 제한도 없을 만큼 광범위하다.

예컨대 크리스 오필리가 1996년에 코끼리 배설물로 그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성모마리아>, 피에로 만조니가 자신의 배설물을 깡통에 담아 만든 <예술가의 똥>은 표현 재료 면에서 여전히 회자되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특히 <예술가의 똥>은 전시와 함께 에디션이 매겨진 90개의 캔이 30g의 내용물만큼 금값으로 환산판매 되고, 심지어 1990년대 소더비 경매에서는 6만7000달러에 팔리는 일이 발생했다.

소변에 플라스틱 십자가상을 담근 <오줌예수>(1989)를 찍은 작품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사진작가 안드레스 세라노, 남자의 정액과 타액을 재료로 삼은 그린 조지&길버트, 지저분한 침실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옮겨와 작품화한 트레이시 에민도 내용보다 표현재료에서 유별남을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제된 상어, 송아지, 염소 등을 포름알데히드에 담아 작품화하거나 살아있는 파리와 썩어가는 동물 시체를 그대로 작품재료로 사용한 영국 yBa를 이끌었던 대표작가 데미안 허스트는 재료의 유별남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의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작품들은 동물학대로 돈을 번 혐오스러운 작가, 뻔뻔한 작품이라는 식의 혹독한 비판도 받았지만, 한때 세계미술계의 파워 1위에 뽑힐 정도로 당당히 현대미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많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가 2007년에 제작한 작품 중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는 인간의 두개골에 백금으로 틀을 씌우고, 그 위에 8601개의 다이아몬드(제작비만 220억원 이상)로 장식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2007년 8월 익명의 사업가에게 5000만파운드(약 947억원)로 팔려서 다시 한번 미술시장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Wolfgang laib 꽃가루 정사각형

한편, 자연재료를 채취해 작업하는 작가도 있다. 독일작가 볼프강 라이프는 자연재료로 작업하는데 즐겨 사용하는 재료가 꽃가루이다. 매년 꽃가루 수확을 위해 6개월 정도 소비해서 얻은 4~6병 내외의 가루를 지정된 바닥에 한 변이 약 1.5~4.5m 크기로 채로 쳐낸 꽃가루를 쌓는다. 라이프의 작품은 꽃가루 채취에서 설치까지의 체험(명상)이 작품과정에 포함된다.

이처럼 21세기 현대미술은 자신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작품세계를 위해 그 어떤 것도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이 자유로움은 주문제작의 경우라도 구매자의 기호보다는 작가의 독창성이나 명성을 존중하는 것에 무게가 쏠린다.

르네상스 시대엔 구매자의 영향력이 절대적

사실 미술이 주문제작 되던 시기에는 주문자 즉, 고객의 입맛을 존중하는 것이 관례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가와 주문자 간에 계약서를 체결해 그것을 기준으로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체결한 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작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물감을 사용해야하는지, 채색방법은 어떻게 할 것인지, 완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제작의 전 과정을 구매자가 세세하게 관여할 수 있었다.

이는 이탈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화가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조건으로 구매자가 미술품 제작에서 완성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예컨대 당시 안료 중 파란색을 얻을 수 있는 울트라마린과 금박에 필요한 금, 빨간 색을 내는 염료 레드레이크 등 몇몇 안료는 구매자가 선호하는 가장 귀한 재료였다. 귀한 안료일수록 그에 대한 사용은 엄격했다. 구매자는 작품을 의뢰할 때 최상품 안료를 최소한 얼마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명시부터 채색과정에서 관련전문가의 감독이나 의견을 거쳐 그에 합당한 금액으로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명시할 만큼 주문자의 영향력이 컸다. 시쳇말로 갑에게 절대권한이 주어졌다.

주문자의 절대권한은 현대미술에서도 여전히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대형공공물을 제작하는 경우 재료나 제작방법, 설치 시 주안점 등을 사전 조율하거나 어떠한 기준을 세워 그에 합당한 조형물을 완성하도록 한다. 국가표준영정동상을 제작하는 경우에는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다. 사료를 통한 검증에서부터 동세, 인물의 인상과 복식 등 전 과정을 세심하게 따져 표준영정을 제작하게 한다.

현대미술은 기발한 재료들로 인해 더욱 풍요로워져

현대미술에서 재료는 예술과 비예술을 나누는 절대기준이 되지 않는다. 현대미술에서는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보다는 재료를 사용한 이유 또는 재료가 작품에 끼친 영향 등에 따라 미적 가치판단이 달라진다. 실제로 미술은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내용이나 형식을 갖추고 있을 때 그만큼 파괴력을 얻는다. 현존하는 많은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현대 미술가들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재료를 활용해 너무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예술작품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현대미술가는 우리가 예술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아니면 스스로 삶에 결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을 만나게 되는 이질감, 즉 새로움이라는 현대미술의 특징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식하며 창작행위에 차용하고 있다.

예술과 비예술 사이에서 맴돌던 키치적 미술품마저 표현재료와는 무관하게 예술작품 속으로 당당히 편입됐다. 이런 점들에서 현대미술은 미술가들의 비틀린 상상력에서 뛰쳐나온 기발한 재료들로 인해 더욱 풍요로운 창조세계를 전해 준다는 긍정적 시각을 가져볼 만하다. 피에로 만조니가 강조했던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의미 있다”는 말처럼 어차피 고유한 재료를 고집하거나 기발한 재료를 찾거나 실질적 미적 판단은 작품의 내재적 의미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각적 아름다움을 절대기준처럼 중시하던 눈높이에서 벗어난 현대미술은 어느 광고 문구처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