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망한다, 내게 허락된 ‘힐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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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우린 중기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허락된 ‘힐링’들을… 청담동 ‘잘 나가던’ 클리닉 접고 인문의학 공간 ‘학아재’ 차린 김로이 원장

기사입력2014-07-07 17:14

김창훈 기자 (ckim2014@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학아재 김로이 원장<사진=학아재>

‘사과나무 한 그루’ 심겠다던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 칼 루드비히 선제후가 제안한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교수직을 고사하고는, 렌즈 세공사와 철학자로 주경야독의 삶을 살았다. ‘철학의 자유’를 견지하기 위해서란다. 21세기 서울. 낮에는 렌즈 대신 레이저를 잡고, 밤에는 ‘행복’과 ‘치유’의 철학에 천착하는 의사도 있다. 청담동의 ‘잘 나가던’ 안티에이징 클리닉을 홀연히 접고 창덕궁 돈화문 건너편에 인문의학 실험공간 ‘학아재’를 차렸다는 김로이 원장(43)이다. 그와 학아재의 흥미로운 ‘변절’을 따라잡기로 했다.

의료선교 꿈꾸던 의대생의 절망

“2003년에 청담동에 노화방지 클리닉을 열 때만 해도 꿈이 컸습니다. 약물이나 수술이 아닌 사람의 몸에서 유래하는 물질로 건강과 미용을 챙겨보자, 질병을 치료할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고 건강한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시켜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당시 이 분야가 세계적으로 ‘뜨는’ 분야였습니다. 문을 열던 해에만 클리닉 3곳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초창기 그룹의 하나로 열심히 공부하고 진료했습니다. 병원 경영도 괜찮다 싶은 정도였습니다. 버는 족족 해외학회 참가에 써버리느라 돈은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만…”

‘아픈 사람 낫게 해주는’ 의사가 되고 싶어 서울대 의대를 다닌 수재였다. 본과 3학년 때 첫 고비가 왔다.

“실습 시절 55살 된 충청도 농부 아저씨를 담당했습니다. 며칠 전까지 밭을 갈던 건강한 분이었는데, 어느날 피곤해서 병원을 찾았다가 덜컥 간암 판정을 받은 겁니다. 저도 그분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단 일주일만에, 구리빛 피부의 건강하던 분이 외양까지 ‘암 환자’로 변하시더군요. 당신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도통 이해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충격, 분노, 자포자기를 차례로 겪고는 1개월 실습 막바지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의사란 직업에 대한 아무런 의심없이 겪은 일이라 충격이 컸다고, 건강하던 한 사람이 하릴없이 죽어가고 있는데 의학이 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허망했다고, 인간적 위로는 커녕 “가망 없으니 집에 돌아가시라”고 권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믿어마지않던’ 현대의학에 대한 실망과 무력감, 허우적거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학이 아닌 철학에 답이 있을까, 본과 3~4학년 시절을 겉돌았다. 김용옥 교수의 ‘너와 나의 한의학’을 붙잡고 불교철학과 니체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의료선교사가 되겠다던 꿈은 저만치 멀어져갔다. 남극 세종기지에 파견된 의료진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노화방지 분야에 매달린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잘 나가는 ‘청담동 원장님’의 참회

“시작단계라 방법론이 조악했습니다. 외국 약 가져다가 친한 고객에게 실험해 보자고 권유하는 식이었습니다. 의학적 방법론이 구축되고 시장도 성숙해지면서 2007년부터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습니다. 문득 돌아보니 ‘청담동에 잘 뿌리내린’ 회원제 노화방지 클리닉이 돼 있었습니다”

한류가 뜨던 시절, 연예인과 그들을 선망하는 사람들로 주가를 올렸다. 이렇게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아이러니다. 약이나 수술처럼 외부의 인위적 개입을 줄이려고 호르몬과 줄기세포 주사를 택했는데, 결국 질병을 고치는 의학의 패러다임과 다를 게 없었다는 회의였다. 이번엔 더했다.

“진시황의 욕망에 편승하고 있다는, 돈과 노화를 바꾸려는 분들을 위해 나를 속이고 있다는 회의였습니다. 고객들 반질반질해진 얼굴과 늘어난 골프 비거리, 그리고 제 병원의 수입명세서만큼 제 자긍심과 행복감이 커지지 않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이건 질병의학보다도 솔직하지 못한 노릇이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부랴부랴 경희대에서 심신의학으로 한의학 박사과정을 시작한 것이 2007년이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놓고 함께 추스르자는 계획이었다. 자신의 약제 처방에 의사와 함께 참여한 정조 임금이나, 철학과 한의학에 기초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다스린 다산 선생처럼 ‘일상에서 갈고 닦는 학문’으로서의 한의학을 좇았다.

학아재 차실의 병풍 ©중기이코노미

“때 마침 어머니가 정년퇴임 직후였는데, 속수무책으로 늙어버리셨습니다. 사회 기여의 역할이 실종되면서 자괴감과 우울에 시달리셨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만나는 횟수도 줄고 노화에 가속도가 붙고, 이는 다시 우울을 불러오는… 악순환이었습니다. 호르몬 주사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였던 겁니다”

‘안티 에이징’에서 ‘해피 에이징’으로 좌표를 수정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돈과 기술로 노화를 늦추려고 하지 말자, 노화와 죽음에 맞설 힘을 젊을 때부터 키워보자는 의도였다. 먼저 청담동 클리닉에 갤러리와 철학강좌를 열었다. 내친 김에 종로 안국동에 해피 에이징만 하는 공간을 따로 열었다.

“청담동에서는 운전기사나 발레파킹만 이용하는 ‘사모님, 사장님’만 상대합니다. 저변을 넓혀보고 싶었습니다. 안국동에 의학, 명상, 철학, 미학 등 강좌를 열고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100% 무료로 진행하되, 고객 중에서 전문가들이 교육기부를 해주셨습니다”

‘청담에서 벌어 안국에서 쓰던’ 시절이었다. 김 원장의 어머니도 이곳에서 자원봉사하며 자연스레 건강을 회복했다. 두 집 살림을 몇 년 하다가 2013년에는 아예 청담동 클리닉을 접고 돈화문 건너편에 ‘학아재’를 차렸다.

의학에서 건강으로, ‘고상한’ 사회적기업

학아재(學我齋)는 ‘나를 배우는 집’이라는 의미에 걸맞은 곳이다. 피부과 등을 주로 보는 의료의 기능과 철학, 미학, 문학, 다도 등 강좌 및 전시, 수행의 기능을 함께 공급한다. 다도뿐 아니라 카페도 운영한다. 서양의학과 한의학, 철학과 예술을 아울러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챙겨보자는 의도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회적기업을 지향한다. 김 원장과 상근간사 격의 유영훈 실장, 교육기부를 하는 몇몇이 주식회사를 차린 김에 사회적기업 인증도 추진중이다. 그렇다고 ‘불우이웃 돕기’를 하는 곳은 아니다. ‘고상하게도’ 철학과 미학, 의학과 예술, 전시와 다도를 다룬다. 이런 심미적 경험을 좀 널리 공유해보자는 곳이다.

“일종의 문화운동을 전개하는 사회적기업, 이라면 의아해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당연히 보조금 같은 것도 기대하지 않고, ‘번 만큼 쓰는’ 활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월세나 급여가 밀릴 때도 있지만 또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흑자 낸 달이 많다는 방증이지요”

교육기부를 하는 조력자들을 비롯한 ‘청담동 시절’ 고객들은 학아재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정신xx 원장’이라며 눈을 꼿꼿이 세우다가도 때가 되면 알아서 강좌를 맡고 ‘시술’을 받는다. 클리닉 간판 하나 없어도 강 건너 도심을 가로질러 찾아준다. 그는 “작은 호의와 신뢰가 돌고 돌면서 큰 반향을 내기도 한다”고 ‘철없는’ 평가를 내놓는다.

“일본의 ‘증여와 평가의 경제’나 우리나라의 ‘미리내 가게’는 화폐를 매개로 거래마다 대가를 ‘동시적으로’ 주고받는 일반적 거래 시스템과 사뭇 다릅니다. 비현실적이고 돈키호테 같은 면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화폐경제보다 더 효율적이고 창의적인 경제체제로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학아재 유영훈 실장 ©중기이코노미

증여와 평가의 경제는, 김 원장에 의하면 ‘돈을 내고 근로하는’ 실험적 방식이다. 그가 예를 든 곳에서는 150명이 매월 우리돈으로 10만원을 내고 일을 하되, 최장 3년을 넘겨 일할 수 없다. 이들이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은 만족감이건 경험이건 평가이건 무형의 것일 수밖에 없고, 이들에게 돈을 받고 ‘노동의 기회’를 준 회사는 그 결과물을 무상으로 공급한다. 일종의 선순환 구조가 발생하는 것은 맞지만 여전히 ‘앞뒤 안 맞는’ 외양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회에서는 확산 조짐에 가속도가 나고 있단다.

미리내 가게는 익히 알려진대로 누군가가 불특정 타인의 물건값, 혹은 식대를 먼저 치러주고, 나중에 가게를 찾은 사람이 이 값에 근거해 ‘당당하게’ 물건 혹은 식사를 즐기는 것이다. 2가지 모두 노동과 지불의 대가가 ‘전도돼’ 보이지만 나름대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저희 학아재에 참여하고 계신 400여 유료 회원분들에게서도 이런 맹아를 보기도 합니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 밀도를 더해주려는 의지와 시도들을 화폐 기반의 ‘동시적 반대급부’로 환산해 낼 수는 없습니다. 노동 등과 대가 등을 주고받음에 있어 시점과 수단, 혹은 화살표의 방향을 달리 할 수도 있을 것이구요”

수익의 일정비율을 목적사업에 재투자해야 하는 사회적기업 학아재에 나이 서른의 유영훈 실장도 주요 출자자로 참여했다. ‘좋은 대학, 좋은 전공, 좋은 직장’에서 얻은 ‘전재산’을 여기에 출자했다. “그런 측면에서 불안감과 의미가 정비례한다”는 그는, 이 일로 자신도 사회도 ‘즐거운’ 경험을 축적해 나가면 좋겠다고 짧게 말한다.

다시 스피노자로 돌아왔다. 자유와 긍정, 현실과 이상. 그에게 이들 개념들이 딴 몸이 아니듯 몸과 마음도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놓고 총체적 건강을 추구한다는 학아재 사람들이, 렌즈 깎듯 생활을 가꿔나가며 어떤 행복을 사회에 내놓게 될지 기대해 보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