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발톱’ 사장님, 영감과 반복으로 美를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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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우린 중기인 ‘파란 발톱’ 사장님, 영감과 반복으로 美를 빚다 ‘전통의 재해석’ 가배공방 류영민 대표

기사입력2014-10-04 01:20

김창훈 기자 (ckim2014@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색은 쪽에서 나온다. 이 사람, 가배공방 류영민 대표에게는 ‘만출어람(萬出於藍)’이 제격이다. 천연염색의 꽃이라는 쪽 염색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색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시간과 농도를 달리하고, 비비고, 담그고, 비틀고, 흔들고, 침투시키기를 반복하며, 말 그대로 ‘발톱이 파래질 때까지’ 매달려 건져낸 색들이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들을 겪어가며 기대치 않았던 결과가 부작용(副作用)처럼 탄생한다. 염색만이 아니다. 하나에 빠지면 밤잠 안자고 매달려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주상복합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그의 공방은 대폭발 직전의 우주 같다. 한 분야로는 도대체 규정하기 힘든 수천가지의 디자인과 시안, 완제품으로 발 디딜 틈 하나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류 대표와 마주앉았다.

가배공방 류영민 대표 ©중기이코노미

자수 통한 전통의상 복원·재해석 꿈

이름 꽤나 알려진 한복집 둘째 딸이었던 부인 이미옥 씨를 만난 것이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었다. 지금도 서울 청담동에서 한복집을 운영하는 부인을 통해 우리 전통의상과 소품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10년 넘게 운영하던 양복지 도매업을 접고 부인을 도왔다. 한 가지에 심취하면 다걸기를 해야 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 했다. 프랑스로 디자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6개월 단위로 파리를 왕복하며 디자인학교를 다녔습니다. 접시닦이 하며 배고픈 예술가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대기만성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물을 보면 어떻게 디자인에 응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착착 떠올랐습니다”

흉배(胸背, 왕·문무백관의 의복 가슴과 등에 수놓은 표장)와 활옷(闊衣, 공주·옹주의 대례복) 등 조선시대 상류층 복식에 들어가는 전통자수를 먼저 손댔다. 자수를 통한 전통의상 복원 및 재해석이 꿈이었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다. 자수(刺繡)가 그의 주력 사업분야가 된 연유다.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우리 전통의상에서 자수는 문양, 색상, 질감 등에서 다양성을 확장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이거라면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류영민 대표는 ‘독립군’처럼 디자인부터 시안제작, 염색, 바느질, 다림질, 심지어 트럭운전까지 모든 역할을 맡아 해낸다. ©중기이코노미

복식 분야에서 시작된 다양한 자수의 문양과 기술은 생활용품 공예로 확대됐다. 필통·수저집·화분통 등으로 저변을 넓히다가 차(茶)와 만나며 깊이를 얻었다. 가배공방의 수제 차도구들은 해외에서 선호도가 더 높다. 찻주전자와 각종 차도구를 넣는 주머니, 혹은 함은 실용성과 예술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찻자리에 수십, 수백만원짜리 찻주전자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 외국 다인(茶人)들에게 입소문이 났습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100퍼센트 수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격이 꽤 나가는데도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나 외국이나 차는 상류층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차 워머(warmer)는 홍차문화가 발달한 영국과 홍콩에서 반응이 좋다. 처음에 홍콩시장을 타깃으로 ‘가볍게’ 시작했다가 영국 본토의 호응으로 ‘심각한’ 수준으로 스케일업했다.

“영국 워머는 우리 것보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감을 갖고 있습니다. 초록 계열의 색도 많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가배 제품은 실크와 린넨 같은 천연소재·천연염색에 젠(zen)한 느낌이 강하니까 일단 신선한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색을 뺄 수 있느냐’며 신기해하는 소비자가 많다고 합니다”

일단 해 본다, 다품종 소량생산

‘일단, 가볍게’는 류 대표의 습관과도 같다. 지금까지 수천가지의 아이템을 ‘가볍게’ 시작했으니, 재미를 본 것은 이들 중 10%도 되지 않는다. 덕분에 지하실 그의 공방은 ‘언제 다시 짐을 싸야할지 모르는’ 유목민의 텐트 같다.

“지하층 주차장 한 켠에 자리 잡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문 옆에 트럭 한 대 세워놓고, 여차하면 바로 짐 싣고 출발하면 됩니다. 누구에게 부탁하고 지시할 겨를 없이 저 혼자 뚝딱 짐 싸면 전시회건 납품이건 한 시간 안에 ‘출동 준비’ 끝입니다”

디자인부터 시안 제작, 염색, 바느질, 다림질, 심지어 트럭운전까지…. 그의 표현대로라면 ‘독립군’처럼 이 모든 걸 혼자 다 해낸다. 앞서 말한 차 워머는 이렇듯 ‘가볍게’ 시작한 수천가지 아이템 중의 하나다.

운현궁 모시 방장 전시회. 서울시청의 발 빠른 지원에 오히려 류 대표가 혀를 내둘렀다.<사진=가배공방>

테이블러너(table runner)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중국이나 홍콩, 장기적으로는 서양 시장을 겨냥했다. 실크·순면·린넨은 물론 대나무까지 아우르는 소재·염색·디자인 등의 요소를 변주하다 보니, 이 아이템으로만 100종을 넘겼다.

특히 대나무 러너의 반응이 좋다. 중국 현지에서 만들어 현지 상류층에게 직접 판매한다. 예의 ’독립군‘ 정신과 이에 잇닿은 일당백의 투지가 이를 가능케 한다. 웬만큼 호흡이 맞지 않는 한, 직원들과 호흡을 맞춰 하나하나 다른 콘셉트와 디자인으로 소량생산을 하기 힘들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다.

“간절하면 통한다고 하던가요? 밤잠 줄여가며 하루 한 두 시간 눈 붙이는 중에도 꿈속에 참신한 디자인이 현몽(現夢)하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 디자인으로 옮길 때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는 경우도 많고, 콘셉트만 기억했다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새로움, 때로는 ‘사고’처럼 얻어지기도

수천가지 디자인을 해내는 그이지만 오히려 전적인 창작은 없다고 손을 내젓는다. 우리 전통이나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개량’하는 수준으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쪽 염색으로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화학물질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과 친환경·건강적인 측면이 점점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쪽 염색은 최고봉입니다. 쪽 원료를 수매하고 발효시키는 등 준비과정만 반년이 소요됩니다. 힘들고 비싼 만큼 오묘하고 깊이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는 전통적인 쪽 염색에 그만의 실험방식을 덧입혀 새로운 색감을 만들어낸다. 시간과 농도를 달리하고, 비비고, 담그고, 비틀고, 흔들고, 침투시키기를 반복한 결과다. 이 과정에서 ‘발톱이 파래질 만큼’ 무한반복을 해야 했다. 때로는 ‘사고’처럼 때로는 ‘부작용’처럼 기대치 않았던 색이 툭 하고 튀어나오기도 한다. 고가품이지만 해외판매만 3억원을 넘길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지난달 14일까지 운현궁 전체를 수놓은 그의 모시 방장(房帳, 방문이나 창문에 치는 휘장) 전시회는 쪽 염색이 가진 천변만화의 맛을 제대로 뽐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시회 성사까지 과정도 극적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참가한 청두 전시회<사진=가배공방>

“모시에 천연염색을 입혔으니 엄청난 고가품인데, 세월호 참사 이후 판로확보가 어려워졌습니다. 샘플을 들고 인사동 화랑가를 기웃거리다가 서울시청 담당자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때가 8월 중순인데, 제 작품을 보자마자 대뜸 운현궁과 잘 맞겠다며 전시회를 추진하자고 하시더군요. 열흘도 채 되기 전인 8월20일부터 운현궁 전시를 열었으니 번갯불에 콩 볶았습니다. 대관료도 없이 전시인력과 홍보물 제작도 지원받았습니다. 시청 공무원이 그렇게 빨리 움직여 주리라고 누가 기대했겠습니까?”

이런 유쾌한 ‘사고’를 종종 만날 수 있는 것은 가배공방을 경영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의 물건을 외주생산하는 중국의 거래처들은 제작비까지 외상으로 받아주기도 한다.

“샘플 들고 가서 만들어 달라고 말하면 ‘제작비 걱정 말고 물건 팔리면 갚으라’며 선뜻 만들어줍니다. 내륙에서 만들어 이번 광저우 전시회까지 직접 배송까지 해 줬습니다. 이런 경험을 반복하는 것도 커다란 낙입니다”

물론 그간 쌓은 신뢰의 덕도 컸고, 당장 현금흐름이 막혀도 저가에 물건을 팔지 않은 고급화전략도 한몫 했다. 그는 “당장 잔고가 바닥난 상황에서도 자식 같은 제품들 덤핑으로 쳐내지 않은 게 자랑스럽다”고 술회한다. 이 ‘자식 같은’ 모시방장은 지금 고이 모셔져 있다. 고비를 넘겨준 덕에 제대로 값을 받을 만큼 시장도 ‘익어줬다’는 것이 그의 평가다.

덕분에 위탁생산과 판로를 막론하고 중화권 거래처들에게는 ‘인기’가 하늘을 찌른단다. “I like Renminbi(이왕이면 현금)” 농담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다. 가배공방은 9월14일까지 운현궁, 8월말 홍콩 및 광저우, 9월 중순 서울코엑스 전시에 이어 10월부터 12월까지는 시안, 간시, 샤먼, 광저우, 쓰촨, 청두, 선전 등 중국대륙을 가로질러 대장정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