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그 ‘날 것’의 힘을 기업경영의 에너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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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우린 중기인 예술, 그 ‘날 것’의 힘을 기업경영의 에너지로 문화마케팅 전문가 남정숙 성균관대 교수

기사입력2014-11-15 00:00

김창훈 기자 (ckim2014@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익산 서동축제 총감독직 공모 제의가 들어왔다. 3개월 공을 들여 멋들어지게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여자라서, 아무래도 이번엔 힘들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기가 났다. 작심을 하고 1년간 그곳에 살다시피 ‘익산이라는 도시’를 공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시민, 기자단, 공무원 앞에서 압도적인 프리젠테이션을 해냈다. 홀가분한 귀경길의 전화 한 통, 기자라는 사람은 입에 담기도 같잖은 의혹부터 꺼내놓는다. 까짓 것 넘겨버릴 수밖에, ‘여자라서’ 힘든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문화판 총감독이 그렇게 예쁘고 폼나는 자리는 못됩니다. 한번 판이 깔리면 거기서 몇 달은 먹고 자는 떠돌이 인생입니다. 골치 아플 일도 많죠. 커다란 예산을 주물러야 하고, 대기업 펀딩이나 흥행도 신경써야 합니다. 여기에 지역 정체성이나 장기적 지향점, 지역경제도 들여 봐야 하고, 심지어는 양지건 음지건 ‘힘깨나 쓰는’ 분들과도 조율 비슷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여자라는 점, 숙소도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고 행동거지는 조심조심입니다. 무엇보다 무형의 결과는 구설에 오르기 제격입니다”

남정숙 성균관대 교수 ©중기이코노미

성균관대 문화융합대학원 남정숙 교수(㈜인터컬쳐 대표)는 서동축제, 서울 장한평 세계거리춤축제, 강원도 봉평달빛극장축제 같은 대규모 행사마다 뚜벅뚜벅 그만의 스타일을 입혀냈다. 국내 유일무이한 지역축제 여성총감독이라는 별칭을 그냥 얻은 것은 아니다. 스무살 남짓 여자아이가 겁 없이 뛰어든 문화판에서 30년을 넘겼다. 이제는 문화콘텐츠와 문화마케팅 정책 개발로 외연을 넓혔다.

담 넘어 ‘땡땡이’가 고작 미술관?

“어릴 때 아주 잘 사는 집은 아니었는데도 할아버지와 부모님 덕분에 클래식음반, 악기, 미술전, 영화, 서커스 같은 문화적 장치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꼭 그래야 하겠다는 고민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문화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춘기 때 ‘땡땡이’의 스케일도 남달랐다. 이화여고 담장을 넘어 서울시립미술관에 잠입해 ‘스트레스’를 풀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가 첫 선물로 사준 카메라가 인생을 바꿨다.

“겁도 없이 사진기자로 사회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따로 사진을 배운 것도 아닌데, 취미가 덜컥 직업이 돼버렸습니다. 별로 어렵지는 않았고, 그냥 카메라 렌즈 뒤에서 세상을 보는 게 색다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까진 빙산의 일각이다. 사진기자를 하기 전부터 대학생 신분으로 백화점 층별 기획안을 내고 직접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드센 공사현장에서 스무살 여대생에게 고분고분할 작업자는 많지 않다. 작업지시를 내리면 대뜸 욕부터 되돌려주기 예사였지만, 머릿속 기획안이 현실로 구현되는 과정에는 심각한 중독성이 있었다. 끊지 못하고 판을 기웃거렸다. 대전엑스포의 한국문화 알리기 제안, 서울정도 600주년, 광복 50주년 등 굵직굵직한 행사에도 참여했다.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노크하기

서동축제<사진=남정숙 교수>

꽤 잘나가는 경력을 뒤로 하고 홀연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에서 6년, 많이 듣고 보고 배웠다. ‘자유로운 영혼’이 보기만큼 근사한 건 아니었다. 30대 후반, 돌아와 보니 자리잡기는 쉽지 않았다. 고깃집에서 불판을 나르며 틈 날 때마다 이력서를 냈다.

“100군데 넘게 이력서를 썼고 합격통보는 서너 곳에서 받았습니다. 학교 강의와 광고기획사 일을 병행했습니다. ‘급여는 절반만, 나머지는 인센티브로 가자’고 시원하게 ‘딜’을 봤습니다. 뉴욕에서 스폰지처럼 흡수한 내용을 이 판에 뿜어놓으면 되겠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즐겁게 일했다. 그 뒤로는 꽤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광고대행, PR, 프로모션으로 이름을 날렸고, 지역축제나 정부·기업의 문화 관련 정책·마케팅 인력풀마다 그의 이름은 상단에 자리잡는다. 수십 건의 총감독, 기획, 자문 경력으로 이력서가 빼곡하지만, 정작 그가 가장 자신있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노크’란다.

“무엇이든 잘 할 자신, 성실하게 일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40 가까운 나이에 100군데 가까이 서류를 내고 그만큼 고배도 마신 셈인데, 자기연민 같은 건 들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일할 곳은 한두 곳인데 인연 맞지 않는 곳까지 신경 써 뭐하겠나 싶었습니다”

남 교수가 아직도 ‘국내 유일’ 지역축제 여성총감독으로 통하고 있는 현실은, 이 판이 여성들에게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거칠고 드세고 말 많고 탈도 많은, 배 속에 너구리 몇 마리는 쟁여놓지 않으면 견뎌내기 힘들다. 그 역시 빛나는 성공만 이어온 것은 아니었다. 좌절도 많았고 ‘애써 재주넘고 보니, 공은 모두 왕서방에게 넘어간’ 일화도 비일비재였다. 그래도 이 판을 ‘끊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대담해야 하는데다 포용력도 있어야 합니다. 트렌드를 읽어내면서도 거시적인 호흡도 봐야 합니다. 대중보다 너무 앞서가면 안되고 딱 반박자 정도만 앞에 서야 하는데 이 호흡을 지키려면 늘 ‘잔발’을 뛰면서 ‘적당히’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도 즐겁습니다. 머릿속이 아니라 현실의 물리적 공간에서, 작게는 스태프들, 크게는 지역주민들과 합을 주고받아 결과를 내는 겁니다”

정부 문화정책, 홍보효과보다 선순환 구축을

강의장면<사진=남정숙 교수>

마치 강박에라도 걸린 것처럼, 최근 부쩍 ‘문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가 잦아졌다. 남 교수가 몸담고 있는 ‘문화마케팅’도 덩달아 찾는 이가 많아졌다. 문제는 문화가 눈에는 잘 안보인다는 것. 이현령비현령 아무데나 문화를 가져다 붙이다가는 자칫 벌거벗은 임금님 짝이 날 수도 있다. 문화강박의 시대, 그의 시각이 궁금했다.

“불과 십수년전만 해도 기업에 문화마케팅 말을 꺼내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 임원들도 ‘왜 기업에 와서 문화 이야기를 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문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문화랍시고 홍보수단이나 대형 이벤트를 짝짓는 경우도 많구요”

그의 문화마케팅론은 단순하다. 문화예술인과 기업가는 ‘다르다’. 뇌구조도 다르고 개념도 용어도 모두 다르다. 이러한 다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상대편 사정에 맞게 변환해 주는 ‘컨버터’ 같은 역할이 문화마케팅이다.

“예술가의 창의성은 어떤 야생성과도 같은 것입니다. ‘날 것’ 그대로 기업의 창의성으로 접목하기 쉽지 않습니다. 경영의 시각, 논리, 용어로 풀어주는 과정이 문화마케팅입니다. 직류와 교류, 영어와 한국어로 변전하고 번역하는 그런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 예술인들은 경제적 이득을, 기업은 창의성과 아이디어, 혹은 새로운 시각을 얻는 겁니다. 물론 잔치판을 깔아주고 끝난 뒤에 정리정돈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그가 몸담고 있는 문화융합대학원은 이런 과정을 주관하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곳이다. 여기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시혜적 접근이다. ‘투자’는 바람직하지만 ‘선심 쓰듯’ 도와줘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일회성 이벤트나 단기 프로모션처럼 결과를 닦달해서도 안된다. 일정한 호흡을 두고 마중물을 붓듯 가야한다. 이 지점에서 정부의 문화정책이 빛을 발해야 한다.

“수혜자의 폭이 너무 넓거나 하는 이유로 기업이 담당하기 힘든 영역이 있습니다. SOC처럼 문화적 저변을 다지거나, 문화예술의 트렌드 혹은 돌파구로 통로를 이끌어주는 역할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돈 덜되는’ 일을 정부가 맡아줘야 합니다. 예전 문화부에 유능한 사무관 한

사람이 몇 년 판을 짜고 나서, 우리나라 문화예술 인프라가 질적으로 변했습니다. 이게 정부의 역할입니다”

기본적으로 문화가 ‘소프트 파워’인 것은 맞다 쳐도, 너무 ‘말랑말랑’ 하게 접근하는 것에는 우려를 표한다.

“적어도 정부 정책에서는 장기적 패러다임과 중·단기적 이슈·트렌드 카드를 함께 돌려야 합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한류나 비빔밥만 죽자살자 우려먹다가는 금세 곳간이 텅텅 비게 될지도 모릅니다. 기업은 이런 것 신경 쓸 여유도 이유도 없습니다. 정부가 해야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공정거래’를 주문한다. 공짜 점심으로는 자존감이 생명인 문화예술인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외양을 한 모리배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바, 부작용은 무시하고 효과만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결국 경제의 입장에서 예술가의 시각이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입니다. 산업혁명도 포디즘도 끝난 마당에 경영에도 개별적·창의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업은 그걸 돈 주고 사는 것이고, 정부는 이런 거래가 잘 돌아가도록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예술인복지재단 같은 것 만들면 줄 세우기 좋고 홍보효과는 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화를 키우고 돈을 벌고 고용을 만들어내는 데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