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마을 피터 브뢰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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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사람 사는 마을 피터 브뢰겔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⑩피터 브뢰겔

기사입력2015-11-27 12:05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브뢰겔의 네덜란드의 속담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브뢰겔의 네덜란드의 속담을 보고>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 브뢰겔이 플랑드르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을 117x163cm 크기의 나무판에 그린 패널화다. 수년 전 뮌헨의 미술관에서 처음 본 그림 속에 감나무에 달린 감 마냥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화가는 뭔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말소리가 들릴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사람들이 황혼이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는 마을의 길가에, 심지어 지붕 위에도 서있다.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들은 그림의 구석구석에 모여서 속담을 재현하고 있다. 김칫국부터 마시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같은 속담 100개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우리네 속담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걸로 봐서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멀리 아득한 수평선으로 바다 위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가 음산하다. 속담이 가리키는 이 모든 어리석음이 그 배에서 비롯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브뢰겔은 이렇게 복잡한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브뤼겔의 그림은 전형적인 개념회화에 속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크게 둘로 나누면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머릿속으로 계획하는 구상단계가 있고,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제작단계가 있다. 구상단계에서 그림을 엄격하게 고정시킬수록 그림은 개념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개념적인 그림은 설계도대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그에 비해 구상단계에서 그림의 전체적인 방향만 제시하고 실제 제작단계에서 보다 많은 우연을 허용하면 그림은 표현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개념에 의존하는 그림은 붕어빵처럼 구상과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아야 하지만, 감각에 의존하는 그림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매번 결과가 다르다. 개념적인 그림에는 노동에 가까운 절제의 덕목이 요구된다. 도면을 무시하고 인부가 제멋대로 집을 지어버리면 안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개념적으로 설계된 그림은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지기 때문에 화가는 그리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수를 억제하거나 제거한다.

브뢰겔의 농부들의 춤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그런가하면 표현적인 그림에는 야생성의 덕목이 요청된다. 표현적인 그림에는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의 기쁨을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놀이의 자유가 있다. 결과를 예측가능하게 만드는 절제와 결과를 예측불가능하게 만드는 자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아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한다. 피터 브뢰겔의 그림은 표현적인 회화와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개념회화에 속한다. 브뢰겔은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스케치북에 끄적거린다. 그에게 선 드로잉은 생각을 끄집어내는 일차적인 수단이다. 약도를 그릴 때처럼 꾸밈없는 간략한 선으로 인물의 동작을 연출한다. 이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개체의 윤곽을 결정하면, 인물설명에 필요한 세부적인 표현에 집중한다.

스케치가 끝나면 그것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다. 또렷한 윤곽선을 기준으로 미세한 명암 단계를 표현하여 볼륨을 만든다. 이렇게 완성된 밑그림에 색을 입힌다. 밝거나 어두운 명도의 차이만 허용하는 고유색을 써서 따뜻한 색조를 형성한다. 브뢰겔의 회화공간을 주도하는 수정주의 미학의 원근법은 조형적 방법론의 하나로, 절대형상을 찾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아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북’에 적혀 있는 한 구절인데 수정주의 미학의 태도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원근법은 사물의 형태를 바로잡는데 유용하다. 모든 작가들은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들은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교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안다면 교정할 수 있다. 같은 실수는 되풀이 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원근법을 작품구성에 처음부터 적용시키려 한다면 혼란만 가중되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그린 농민화가

브뢰겔의 자화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피터 브뢰겔(Pieter Bruegel 1525~1569)은 이야기꾼이다. 우화처럼 도상학적 해석이 필요한 그림은 상징의 의미나 모티브를 모르면 감상이 불가능하다. 종교나 신화를 주제로 그린 그림이 대개 그렇다. 브뢰겔은 조금 달랐다. 그는 종교나 신화 대신 우화 같은 일상을 그렸다.

흔히 있을 법한 마을의 풍속을 그린 그의 그림은 거대한 동화책의 한쪽을 펼쳐 놓은 것처럼 우리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다.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그림 덕분에 교훈적인 속담도 살갑게 느껴진다. 그는 섬세한 관찰자의 눈으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 속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풀어놓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농민화가라 불렀다.

브뢰겔은 이웃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는 그가 본대로 꼼꼼하게 재현했다. 그의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자신의 일상세계를 낱낱이 들여다보게 했고 그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세심한 관찰자의 눈에 비친 정겨운 마을 풍경의 디테일은 소탈한 감수성과 더불어 그의 인문주의적 소양을 엿보게 한다.

브뢰겔은 현실참여적인 태도로 서민들의 정직한 삶을 대변했던 화가다. 그는 ‘게으름뱅이의 천국’이란 그림에서 농부와 학자와 군인이 나무 밑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얼핏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 브뢰겔은 스페인 용병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진 동포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울 요량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 시대에 정치성이 짙은 주제의 그림을 그리려면 상당한 용기와 자기 확신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정치적으로 오해 살만한 그림을 폐기하도록 유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