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적인 조명…빛과 그늘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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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연극적인 조명…빛과 그늘과 그림자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⑫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

기사입력2016-02-14 13:34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멈칫, 발걸음을 멈춘다. 미술관의 다음 전시실에 막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화려한 금박 액자 안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다. 그림에서 서너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그림 속의 인물이 또렷이 보였다. 순간 눈동자가 마주쳤다. 늙수그레한 렘브란트였다. 그는 검은 사각 공간 안에서 뚫어져라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34살의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더 가까이 다가갔다. 엉겨 붙은 물감이 보인다. 이미지는 사라지고 쭈글쭈글한 물감과 그 질감만 남았다. 물감을 얇고 매끄럽게 펴는 붓질로 대상을 그리는 종래의 그림과는 달랐다. 두꺼운 물감의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표면의 질감은 그 자체로 그림 속 인물의 살갗이 되어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렘브란트는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눈으로 중력에 맞서 버팅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림에 옮겨 놓았다. 그때 거기 있었을 그 인물과 지금 이 그림 속의 인물 사이에 화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고여 있다.

렘브란트는 왜 자신의 늙은 얼굴을, 그것도 있는 그대로 그렸을까?

렘브란트는 걸출한 초상화가다. 그는 빛과 그늘 속의 인물을 화폭 안에 완벽하게 재현했다. 배경으로 흐르는 은은한 반사광과 스포트라이트 조명효과는 무대 앞으로 인물을 불러냈다. 빛과 그늘과 그림자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의 탁월한 솜씨는 사람들을 탄복시켰다.

한 줄기 신성한 구원의 빛이 어둠을 갈라 우리를 거기 있게 한다. 그 한 줄기 빛은 밝은 하늘 아래 만물을 생동케 하는 태양의 빛과는 다르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정오의 태양빛이 모든 피조물에 내려앉는 신의 손길이라면, 이 한 줄기 빛은 악의 어둠을 헤치고 특정한 사물을 밝혀주는 신의 뜻이다. 낮의 빛은 모든 사물을 있게 하고 밤의 빛은 특정한 사물을 있게 한다. 어둠에 묻힌 우리는 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우리는 주변부에 속하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세상의 중심이 된다.

렘브란트의 마지막 자화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사물은 실선이 아니라 점선의 윤곽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빛을 실어 나르는 공기를 통해 현실 공간 속 모든 사물과 현상을 본다. 대상을 본다는 건 사실 대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의 상태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닫힌 실선보다 열린 점선이 사물의 윤곽으로 잘 어울리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경계를 따르는 점선의 윤곽은 흔들리는 빛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 개념적으로 확정된 또렷한 실선의 윤곽은 눈앞에서 멀어질수록 흐릿하게 보이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의 윤곽처럼 점선의 윤곽은 적당히 떨어졌을 때 초점이 맞아 더 또렷하게 보인다. 개념적인 실선의 윤곽이 현상에 대한 판단이라고 한다면 점선으로 표현된 스푸마토의 윤곽은 현상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스푸마토의 경계를 가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가 ‘서서히 떠오른’ 이미지라면 연극의 주인공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환하게 비춰진’ 이미지다.

파란만장했던 렘브란트의 삶

렘브란트는 방앗간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귀족 가문의 어머니 사이에서 여덟 번째로 태어나 어린 시절 유복하게 자랐다. 청년 렘브란트는 레이던 대학에서 철학공부를 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와 공방을 차려 일찌감치 20대의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젊고 솜씨 좋은 그에게 주문이 잇달았다. 그는 승승장구했다.

그가 36세에 그린 ‘야경’(363×437cm)은 드라마틱한 인물배치와 극적인 스포트라이트의 효과를 살린 단체초상화로 단번에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렘브란트는 유능한 화상의 사촌이자 행정장관을 지낸 명문집안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하여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동네에서 살았다. 하인을 거느리고 식도락을 즐기며 진귀한 물건을 수집하는 등 귀족생활을 누렸다.

조명의 명암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그러나 불행은 곧 찾아왔다. 야경을 발표한 그해 렘브란트는 아내를 잃었다. 첫째를 사산한 후 두 차례의 유산 끝에 간신히 아들을 얻었지만 임신 후유증으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어린 아들을 키우는 유모와의 내연관계가 나중에 들어 온 젊은 여성가정교사와의 또 다른 내연관계로 인해 깨져버리자, 유모는 렘브란트를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했다. 그는 매년 200길더를 유모에게 지불해야 했다.

결국 그는 50세에 이르러 법원에 파산신청서를 내고 말았다. 살던 집과 그동안 모았던 모든 수집품을 헐값으로 처분해야 했다. 파산자 렘브란트는 제 이름으로 상거래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과 가정교사의 이름으로 그림을 주문받아 생활을 꾸렸다. 렘브란트가 57세 되던 해에 살림을 도맡았던 38세의 가정교사가 죽었고 5년 후, 27세의 아들마저 죽어버리자 그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다. 렘브란트는 이듬해 1669년 63세를 일기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사실 렘브란트에게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1660년 암스테르담 시청사의 벽화를 맡은 호바르트 플링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렘브란트에게 그 일이 맡겨졌다. 사람들은 대작 ‘야경’을 떠올리며 그의 옛 솜씨를 기대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5×5m 크기의 벽화 ‘율리우스 키빌리스의 음모’를 그렸다. 그림은 광휘에 휩싸여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의 저돌적인 붓질 때문에 거칠어진 표면이 사람들의 눈에는 뒤엉킨 물감덩어리를 성의 없이 방치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그림은 매끈한 표면의 환영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지 못했다. 몇 달 만에 벽에 부착된 그림은 철거되었고 둘둘 말린 채 화가에게 되돌아왔다.

그는 왜 옛 솜씨를 발휘하지 않았을까? 아마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일 테다. 이미 올라선 경지를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선 경지가 아니라 스스로 딛고 있던 지반을 높여 도달한 경지이기 때문에 내려올 곳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경지를 사람들이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역시나 시대를 앞서 간 자들이 맛보곤 하는 좌절을 피해갈 수 없었다. 사람들의 얄팍한 안목이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붓을 놓을 수 없었다. 그는 점점 그림의 일부가 되어갔다. 눈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붓 터치로 그린 그의 마지막 자화상은 허탈한 웃음을 허공에 날려 보내고 있다. 그는 그림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