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한 대기…윌리엄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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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아스라한 대기…윌리엄 터너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⑬윌리엄 터너

기사입력2016-03-04 09:39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터너의 눈보라-하버만의 증기선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열린 구조의 회화공간 구축한 터너

거대한 힘이 발광하고 있는 중심을 향해 휘돌아 든다. 태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이 넘쳐흐르는 힘이 중심에 빨려 들어간다. 묽게 배어든 물감은 음영을 따르고, 불투명한 물감덩어리가 빛을 좇는다. 낭창한 돛대 위로 나부끼는 깃발에 눈길을 옮기자 비로소 배가 보인다. 검붉게 넘실대는 파도와 짙은 암갈색으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불길한 느낌을 준다. 기울어진 바다와 흔들리는 대기가 불안하다. 난 어느새 그림이라는 숲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눈보라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을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

제목 옆에 붙은 긴 부제는 그림의 이미지가 화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선원들에게 돛대에 내 몸을 묶게 하여 폭풍우를 관찰했다. 네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곳을 벗어났다면 이런 폭풍우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윌리엄 터너

그러나 아무도 터너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당대 비평가들은 악평을 서슴지 않았다. 회반죽 덩어리의 바탕칠과 비누거품 밖에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라며, 아무렇게나 붓을 내깔긴다고 모두 그림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로 그를 조롱했다. 닫힌 구조의 회화공간에 익숙했던 당시의 안목으로는 열린 구조의 회화공간을 구축한 터너의 그림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열린 구조의 회화공간에는 아무 것도 확정되지 않는다.

“나는 이해받으려고 그림을 그린 게 아니야. 단지 폭풍우의 장면이 내게 어떻게 보였는지 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윌리엄 터너

터너의 불타는 국회의사당을 보고, 19.5×42.5cm, charcoal on paper 2013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에서는 사방을 둘러봐도 가만히 있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차가운 불빛이 일렁이는, 대기의 불안정한 흐름 속에서 모든 사물이 흔들린다. 원심력에 의해 나선형으로 뻗어나가는 대기의 기운이 무한하다.

비어있는 중심을 향해 소용돌이치는 물결처럼 붓질 하나하나가 눈앞의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대상은 결코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는다. 수만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모여 수시로 그 형태가 변하는 물고기 떼를 이루는 것처럼 현상을 좇는 일획이 모여 흔들리는 이미지가 된다. 붓질의 궤적을 쫓아 더듬어 볼 때 비로소 그림이 열리기 시작한다. 감상자는 이때 관념의 매개 없이 그림이라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노출된다.

언젠가 간송미술관에서 3절 크기의 일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붓질 하나가 일획이라면 담묵의 일획이 물결마다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획 한 획마다 눈을 맞추어 더듬어 보았더니 40여 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아마 그림 앞에서 보낸 가장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벌어지는 절체절명의 사건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는 그림 속에 파묻혀 그 안으로 들어간다. 화가의 붓끝이 대기의 흔들림 속에 던져진다. 분명한 것이 하나 없다. 불안정한 대기의 흐름 속 사물의 윤곽이 흩뿌려진다. 사물의 이미지는 초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성긴 붓놀림으로 개체와 개체 사이를 흐르는 유체를 쫓아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림의 실마리와도 같은 깃발을 그려 넣는다.

“……낮게 깔린 차가운 밤안개 속에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밤안개는 죄를 저지른 배 한 척 위로 죽음의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배는 번개 치는 바다에서 악전고투한다. 돛대는 공포로 가득한 하늘 위에 핏빛 시를 써내려간다.”- 존 러스킨

터너가 그린 <죽은 자와 죽어가는 자를 배 밖으로 던지는 노예선>을 보고 감동한 존 러스킨은 이런 비평을 남겼다. 당시 20대에 불과했던 젊은 러스킨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터너를 비아냥거릴 때 홀로 그의 예술세계를 예찬했다.

젊은 터너의 자화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헌신적인 조력자였던 아버지 죽자 은둔의 삶 선택

윌리엄 터너는 영웅적 소심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대를 앞질러간 그의 천재성을 사람들이 몰라주자 자신을 자처해서 소외시켰다.

12살 터너는 아버지 가게의 손님들이 그 그림을 사갈 정도로 천부적인 그림 솜씨를 발휘해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775년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나, 27세에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고, 32세에 원근법 교수가 되었다. 그는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터너는 명확한 윤곽선과 차분한 음영 같은 모든 고전적인 양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대신 거칠고 행위적인 붓터치가 그림을 채웠다. 그는 전통적인 닫힌 구조에서 벗어나 열린 구조의 회화공간을 추구하며 시대를 앞서갔다. 이미 질적으로 어떤 경지에 이른 화가에게 현실은 뒤쳐진 과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그렇게 다다른 경지를 무르거나 되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터너가 그림에서 이룬 경지는 터너에겐 현재의 것이지만,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겐 아직 어색한 미래의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자의 숙명이다. 조금 시대를 앞서나갔을 뿐인데 자신의 그림이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자 그는 의기소침해진 나머지 점점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사생아로 태어난 두 딸과, 그 아이들의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기면서 터너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갔다. 헌신적인 조력자였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아예 사람들을 피해 은둔의 삶을 살았다. 사람들을 피하려고 부스 제독이라는 가명까지 썼으며 누구도 그가 사는 곳을 몰랐다. 1851년, 익명으로 투숙한 여인숙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역시 아무도 그가 화가 터너임을 알아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