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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빛으로 충만한 여백에 펼쳐지는 관조의 심상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⑭차오르는 심상…겸재 정선
- 기사입력2016-03-24 09:59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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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은 관조의 시선으로 자연을 보고서, 화선지의 투명한 여백에 농담을 능숙하게 구사하여 일획을 늘어놓았다. 그의 회화세계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는 일획과 농담 그리고 관조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겸재의 농담법은 서구 고전주의의 명암법과 비교해볼 수 있다. 명암법이 밤의 어둠을 밝혀 사물을 드러낸다면, 농담법은 낮의 빛을 차단하여 사물을 드러낸다. 명암법이 어둠을 배경으로 그늘과 그림자를 드리우면, 농담법은 빛이 투과한 정도에 맞추어 농담의 차이를 만든다.
명암법에서 윤곽은 밝음과 어두움이 만나는 경계를 따라 결정된다면 농담법에서는 사물의 중심은 색이 짙고(濃) 가장자리는 색이 옅어서(淡) 그 가장자리에서 윤곽이 형성된다. 또, 명암법에 따라서 조각적 볼륨을 표현할 때는 개체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더 어둡게 처리하지만, 반대로 농담법에 따르면 개체의 가장자리를 오히려 옅은 담묵으로 처리한다. 농담법은 공기의 농담에 따라 또렷하거나 흐릿한 차이로 사물을 분간하는데, 이것은 투시원근법이 소실점을 기준으로 사물의 크기를 조정하는 것과 구분되는 점이다.
평상시와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풍경(風景), 특별한 사건으로 내게 들이닥치는 풍광(風光), 그리고 사색의 과정이 개입하는 산수(山水)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각기 다르다.
풍경이 투시원근법적 시각체계로 현실을 재현한 것이라면, 풍광은 흔들리는 빛에 노출된 현실의 자연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산수는 관조의 눈으로 현실을 마음속에 한번 담았다가 다시 기억으로 건져 올려 펼쳐낸 것이다.
풍경이나 풍광과 달리 산수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이자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풍경이 유리창에 비치는 것 같은 관념의 이미지라면, 풍광은 흔들리는 빛의 이미지고, 산수는 자연의 흐름을 쫓다보면 드러나는 마음의 이미지다.
정선의 인곡유거도를 보고, 29.5×44.5 cm, charcoal on paper, 2013관념의 눈은 풍경, 응시의 눈은 풍광 그리고 관조의 눈은 산수와 서로 조응한다. 관념의 눈은 사물의 외관을 객관적으로 고정시키고, 응시의 눈은 현장의 흥겨움을 몸으로 토해내며, 관조의 눈은 마음속에 담은 것을 훗날 되새김질하듯 뱉어낸다.
응시의 눈으로 보면 이미지에 주름이 접히고, 무심한 관조의 눈으로 보면 주름진 이미지가 도로 펴진다. 응시의 눈에는 오직 ‘너’밖에 안 보인다. 응시의 눈으로 그림을 보면 오로지 그림에만 몰입하여 그 안에 빠져 들 것이다.
이때의 나는 그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 관조의 눈에는 무수히 많은 ‘나’가 보인다. 응시의 눈과 달리 관조의 눈은 ‘너’를 포착하면 그것을 계기로 뭉게뭉게 기억의 이미지를 피어 올릴 것이다. 고요한 마음의 숲을 비행할 때 관조의 시선이 작동한다.
정신이 하늘만큼 드높고 몸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며 마음이 차올라 강처럼 흐른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그림속에 머물 때 우주가 내 안에 열린다. 무심한 관조의 시선이 너울거리는 날갯짓 사이로 반짝이는 이미지를 수시로 주워 올린다.
눈에 보이는 자연의 실재를 바탕으로 진경의 세계 열어
정선의 독서여가도를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겸재 정선은 대기만성형의 화가였다. 정선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늙은 어미를 모시고 살았던 전형적인 선비이자 화가였다.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그나마 양반인 덕에 38세의 나이에 관직을 얻어 조금씩 살림을 회복해 갔고, 그림의 공력이 쌓여 나름의 경지를 이루어감에 따라 오랜 벗과 풍류를 즐길 수 있었으며, 자신만의 그림 세상에선 스스로 신선이 되어 살았다.
정선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실재를 바탕으로 진경의 세계를 열었다. 자연을 몸으로 체감했고 본대로 그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 산수의 창백한 이미지와 달리 그의 진경산수화는 생동하는 자연을 마음에 담았다가 일획의 붓질에 실어낸, 또 하나의 진정한 자연이었다.
60대 중반에 그린 <인곡유거도>를 가만히 보다 보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산자락에 사는 벗과 시화를 나눌 요량으로 이제 막 초가대문을 나서서 두어 번의 헛기침을 하고는 봄내음이 진동하는 뜰 안을 천천히 걸어간다.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겨우내 젖은 마음을 봄볕에 말리고 있던 주인장이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돌려 뜰을 내다본다.
만년에 그린 <너럭바위> 또한 눈에 착 달라붙는다. 우리네 산천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보았을 너럭바위다. 바위와 물의 결을 따라 바람처럼 시원한 붓질이 더벅머리 산을 부스스 일으키더니, 털썩 가부좌를 틀고 대자연과 마주한 두 선비의 선선한 마음도 함께 일어났다. 정선의 호쾌한 붓질이 흰 종이를 허공 삼아 넘나들었다. 화폭의 크기와 상관없이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런데도 디테일에 소홀함이 없다. 그는 하얀 화선지를 빛으로 충만한 허공이라 보았다. 순간에 충실한 순도 높은 일획은 그의 그림의 원천으로써, 꼿꼿한 존재감이 있었다. 미세한 붓끝의 떨림이 생생한 느낌을 더해주어 실경이 진경이 되었고 그 울림은 멀리 퍼져갔다.
정선은 84세로 장수했는데 그의 그림은 노년을 지나 만년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할 정도로 기를 더해갔다. 수작이라고 할 만한 그림 상당수가 관직을 그만두고 한적한 삶을 살았던 70세 이후에 그려졌다. 그에게는 인왕산의 기슭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육십년지기, 사천 이병연이 있었다.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시인이었던 둘은 시를 지어 보내면 그림으로 화답하고 그림 한 점을 보내면 시 한 수로 응답하며 함께 풍류를 즐기는 사이였다.
정선이 76세에 그린 대표작 인왕제색도가 병중인 벗과의 사별을 나흘 앞둔 5월25일, 슬픈 마음을 담아 시인이 살고 있는 비 개인 산기슭의 정갈한 집을 바라보며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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