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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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해”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⑮흔들리는 빛…끌로드 모네

기사입력2016-04-19 14:55

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모네의 방

나오시마 지중미술관의 모네의 방에 들어섰다. 주사위만하게 깎은 하얀 돌이 전시실의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다. 굳이 실내화로 갈아 신으라는 이유가 이거였다. 걸음을 뗄 때마다 조심스러웠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모네의 수련 연못을 보고, 24.5×39.5 cm, charcoal on paper, 2013

침침한 중간 홀을 지나자 전시실의 열린 문으로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입구에 서서 방을 둘러보았다. 천장높이가 10m, 넓이는 100평쯤 되는 넓은 홀에 아련한 수련 그림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다. 보드라운 빛이 그림의 표면을 신비롭게 감싸들었다. 천상의 고요함이 느껴졌다. 모네의 수련은 2×6m 크기의 두 폭짜리 기다란 작품이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온통 하얀 가운데 불그스레한 주황과 푸르스름한 청록의 수련 그림이 별도의 조명장치가 없는데도 선연히 빛났다. 천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터진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자연광이 실내를 밝혔다. 서서히 조도가 변하면 들숨과 날숨처럼 빛이 하얀 방을 호흡한다. 그때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그림의 빛깔이 잔잔한 파도처럼 동공을 파고들었다. 수련 그림은 살아있었다. 보고 있으면 거대한 생물체의 심장속에 들어와 박동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동안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으로 모네의 방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저만치 모네가 보이는 듯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등장

1850년에 등장한 사진기와 튜브물감은 인상주의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증기기관차의 출현으로 인해 도시의 노동자들은 목가적인 일상을 찾아 교외로 떠날 수 있었고 파리의 가난한 화가들도 그들과 함께 교외에 나갔다. 사진기가 신을 대신해서 세상을 재현하는 화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는 바람에 화가의 생존은 근본적인 위협을 받았다. 사진기의 성능은 산업혁명 이후 기계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나날이 향상됐기 때문에 화가는 처음부터 경쟁이 되질 않았다.

모네의 네그루의 포플러 나무를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그들은 먹고살 다른 방도를 궁리해야 했다. 그런 고민 끝에 사진기의 눈과 달리 쏟아지는 빛의 자연을 맨눈으로 마주하여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다름 아닌 인상주의자들이었다. 튜브물감은 운반과 보존이 쉬워서 밖에서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각종 재료를 빻아 만든 안료를 기름에 개서 써야 했기 때문에 실내를 벗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짜서 바로 쓸 수 있는 튜브물감 덕분에 인상주의자들은 자연광의 현란한 변화를 쫓아 더 많은 색을 구사할 수 있었다.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그려야 해” -끌로드 모네

모네는 연못가에 커다란 파라솔을 펴고 팔레트에 물감을 짠다. 얼마 후 낮과 밤이 교차하는 시간이 되면 푸르스름한 보랏빛이 감도는 가운데 그는 언제나처럼 날뛰듯이 붓을 움직여 나간다. 듬성듬성 캔버스 위에 망설임 없는 획과 획이 쌓여간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댄디스트 모네

“내 입장을 생각해보게. 아이는 병이 났는데 수중에 돈 한 푼 없으니‘(...)’ 내 그림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암담하네, 난 빈털터리야. 굴욕적인 가난 앞에서 좌절을 거듭했고,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네. 자네만 믿네, 친구여‘(...)’ 지금 난 온통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네. 들판에 나가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이 되면 사랑하는 가족이 불을 지펴놓고 기다리는 작은 집으로 돌아간다네”

모네의 베레모를 쓴 자화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댄디스트였다. 댄디즘은 멋을 중시하는 정신적 귀족주의다. 가난을 혐오했던 모네는 수시로 주변사람들에게 생활의 곤궁함을 알리는 편지를 쓰면서도 문화적인 생활수준은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계속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강에 배를 띄워 그림을 그렸고, 고압적인 태도로 역장을 설득하여 며칠씩 생라자르역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 그림을 그렸으며, 포플러 연작을 그릴 때는 가로수를 사들였다 되팔았다 하더니, 말년에는 아예 집주변의 땅을 사들여 커다랗게 연못을 만들어 놓고 몇 장이고 수련을 그려댔다.

“갑자기 눈을 뜨게 된 장님처럼 그려야 해. 나는 대상과 나 사이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이지, 어떤 의미를 설명하려는 게 아니야” -끌로드 모네

모네는 평생 빛을 그렸다. 처음엔 자연 속에 내려앉은 빛의 시각 효과를 다분히 설명적으로 그려낼 뿐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는 명멸하는 빛의 순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흘끗 망막에 비친 사물의 인상을 그림으로 옮기자 풍요로운 색채가 화면을 그득하게 채우게 되었다.

1866년 26세의 모네는 마네의 ‘풀밭 위에 점심’을 모방하여 ‘소풍’이란 제목으로 370x550 cm 크기의 작품을 야심차게 기획했다가 미완성으로 끝내고 만다. 이듬해 인상주의 화풍이 한층 더 도드라진 ‘정원의 여인들’을 살롱에 출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낙선 화가로 계속 궁핍한 삶을 살았지만 이미 발을 들인 인상주의의 커다란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모네는 32살의 아내 카미유 동시외의 병상을 지키는 상황에서도 죽음의 언저리에서 어른거리는 빛의 순간을 쫓아 그림을 그렸다. 루앙성당, 낟가리, 포플러 따위에서 빛의 변덕을 좇아 그림을 그렸으며, 아침 햇살과 석양이 비치는 하루의 변화도 그렸고, 이것들을 계절별로 그리기도 했다.

모네의 연작을 두고 사람들은 장삿속에서 나온 것이라 의심하기도 했다. 가난한 모네는 생활고를 면하려고 이전에 ‘인상, 해돋이’를 800프랑에 구입한 그의 후원자 알리스 오슈데 부인의 집에서 그녀의 여섯 자녀들과 함께 살기로 한다. 이듬해 병으로 아내를 잃은 모네는 곧 알리스와 연인 사이가 되었고, 십여 년 후엔 미망인이 된 그녀와 재혼한다. 모네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지베르니의 저택에서 알리스와 대가족을 이루고 평온하게 살았다. 모네는 시시때때로 저택의 연못을 그렸다. 백내장을 앓아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빛을 좇아서 그림을 그렸다. 1926년 86세로 눈을 감은 그해, 모네는 연못가에 홀로 앉아 중얼거렸다. “난 다만 우주가 내게 보여주는 것을 붓으로 증명해보이고자 했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