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회화만의 특유한 ‘상상 그리고 상호교감’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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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동양회화만의 특유한 ‘상상 그리고 상호교감’의 공간 [그림을 읽다:한국화] ⑤여백을 통한 비움과 채움

기사입력2016-06-07 17:54

오민수 객원 기자 (dat1127@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천(天)의 상징은 여백, 인(人)의 상징은 필묵으로 표현

예부터 자연은 동양인에게 영원한 정신적 귀의처이며 만물의 근원적 원리로서 존재해왔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은 이러한 동양적 자연관의 중심에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개념인 ‘도(道)’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이 인위(人爲)를 배제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원(馬遠)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견본묵서담채, 26.7×50.6cm, 남송시대·13세기, 도쿄국립박물관

그러므로 동양인들은 영원한 존재 가치로서의 자연을 숭배하고 이에 조화하면서 자연속의 일부분이 되고자 하였고, 또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고 그 속에 담긴 섭리를 깨달으면서 이에 순응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천인합일사상(天人合一思想)이 중요시 되었다. 바로 천(天)의 상징이 여백이며, 인(人)의 상징이 필묵으로 그려진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양의 회화에서 비어있는 공간(空間)과 보여지는 것(象)은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동등하게 중요하였다.

여기서 비어있는 공간을 여백(餘白)이라 부른다. 화면상에 여백을 남기는 것은 서양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회화만의 독특한 화면 구성법으로 여백은 막연히 남겨져 비워둔 공간이 아니라, 감상자로 하여금 그 여백을 상상으로 채워 넣도록 하여 작품 감상의 공간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여백은 화면을 배치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여백’을 잘 처리하면 화면에 생동감이 있고 숨이 통하며 옹색하게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보려고 하는 것과 나타내려고 하는 동양의 마음이 나타난다.

팔대산인, <팔팔 조도>, 종이에 수묵, 31.7×27.5cm 1694년 개인 소장

작가의 의도에 의해 나타나는 여백은 동양의 미에 대한 의식이 화면상의 공간표현을 순수하게 연구한 것으로, 화면에서 나타내려고 하는 왕성한 의욕을 담담하게 표현하여 공간을 간소하고 그것을 비워둠으로써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성급히 표시하지 않는 정적인 아름다움을 말한다.

여백의 처리는 보다 많은 상상력의 세계를 낳게 하고 암시하거나 함축하는 시각적, 조형적 표현의 기술이기도 하다. 결국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백은 완성이 아닌 시발점이 된다. 곧 여백이란 완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는 것을 취함으로써 함축성을 지니고 보다 많은 상상의 세계를 낳게 하고 암시하는 시각적인 조형 표현인 것이다.

조형적 가치를 지닌 여백 통해 감상자의 상상력 자극

화면구성에서 여백의 미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송대 산수화 특히 남송대부터이다. 남송대에는 마원(馬遠), 하규(夏珪)등의 소위 남송원체(南宋院體)화가들에 의해 여백의 미가 본격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중국 강남지방 특유의 풍광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항상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눈 뒤 한 모퉁이나 한 변에 치우쳐 중요한 상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여백으로 남겨두어 강조하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마원(馬遠)의 작품에 드러난 여백은 오히려 관자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며, 오히려 빈곳이라기보다 더 의미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의 작품 <산경춘행도(山徑春行圖)>는 봄날에 수양버들이 새싹을 피우기도 전에 거문고를 든 어린 동자를 데리고 한 선비가 길을 나서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화면은 마원 특유의 대각선을 기점으로 왼쪽은 형상화 작업을 했고, 오른쪽에는 여백을 주어 감상자로 하여금 비어있는 공간을 상상으로 채워 넣도록 하고 있다.

마원(馬遠) <산경춘행도(山徑春行圖)>, 宋, 絹本設色, 27.4×43.1㎝, 台北古宮博物館藏

여기서 여백은 봄소식에 대한 생략의 공간이다. 선비가 길을 나서는 방향으로 길게 뻗은 수양버들에 돋아난 새싹과 하늘을 나는 새들에서 약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지만 수많은 봄소식은 여백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시정이 무르익는 봄나들이 표현이 사의적으로 의미 있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즉 형상(形象)들의 시공간에 대한 연상(聯想)과 형상을 둘러싼 여백은 주제를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감상자의 상상력에 비어있는 공간이 어떻게 채워져야만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여백은 표현된 형상뿐만 아니라 자연형태를 더욱 생명화(生命化)한다.

동양회화만의 특유한 공간인 여백은 화면의 한쪽을 ‘비워둠’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격조있게 만들어내고, 의도적으로 미완의 여지를 남겨두어 감상자의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작가와 감상자간의 상호 교감의 공간이 된다.

따라서 그려지지 않고 남겨진 공간이라 하더라도 여백은 그 독특한 조형적 가치를 가지며, 표현에 있어서 남겨진 공백으로서의 여백은 그려진 대상의 의미를 함축할 뿐 아니라 그려진 대상과 동일한 조형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여백은 충실하게 비어있는 공간이며 현상적 풀이가 배제된 빈 공간이면서 동시에 모든 가능성이 담길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 된다.

화면 속의 비움과 채움은 상대적이면서도 합일(合一)적 관계로 공존을 통해 작가와 감상자의 감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