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랍 속 앨범도 충분히 예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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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우리 서랍 속 앨범도 충분히 예술적이다 [장정민 미술평론가의 포토 리뷰] ⑫장보윤 작가

기사입력2016-12-28 09:58

장정민 객원 기자 (viumgraphy@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오늘날 사진은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각예술 매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어떤 사진을 가리켜 예술사진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많다. 다만 한 사람의 작가가 예술적인 목적을 가지고 촬영한 사진을 예술사진이라 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일 뿐이다.

1968, Summer, at the Beach Archival digital C print, 76x110cm, 2009

그렇다면 작가 자신이 촬영하지 않은, 심지어는 예술적 목적 없이 촬영된 타인의 사진은 예술사진이 될 수 없는 것일까? 특정한 주제에 맞춰 대상을 선정해 촬영하고 작품화하는 일반적 방식을 취하지 않고, 타인에 의해 촬영되고 버려진 사진을 이용하는 장보윤의 작업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보자.

누군가 버린 슬라이드 필름 뭉텅이가 새로운 작업의 계기 돼

장보윤이 타인의 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기억의 서:K의 슬라이드>부터였다. 지난 2008년 11월, 집 근처 공사장에서 누군가 버린 슬라이드 필름 뭉텅이를 발견한 것이 계기였다. 촬영된 날짜와 장소가 구체적으로 기록된 400여컷의 꽤 많은 필름이었다. 이것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장보윤은 사진을 촬영한 이가 40여년 전에 일본의 니가타와 오사카를 여행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필름의 주인에게 K라는 이름을 붙였고, K의 일본 유람을 직접 추적하기에 이른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남자의 40년 전 여행을 단지 사진 속 정보만으로 따라가며 스스로 K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Your First Year1 Archival digital C print, 76×110cm, 2013

2011년에 선보인 <밤에 익숙해지며>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 작업이다. 당시 뉴욕의 한 레지던시에 참여 중이었던 그는 마틴이라는 노인으로부터 세 권의 버려진 사진앨범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사진의 주인에게 리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K에게 그랬듯 장보윤은 다시 한 번 리사에게 새로운 기억과 이야기를 부여했다. 2013년의 <너의 첫 번째 해> 역시 리사의 앨범에서 선택한 3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진 전시였다. 아무런 제목 없이 그저 이름 모를 아기의 어린 시절을 관객에게 제시함으로써 장보윤은 자신이 그랬듯 관객 또한 사진속 대상으로부터 자기의 기억을 환기하게끔 유도했다.

이처럼 장보윤이 보여준 일련의 작업들은 일반적인 예술사진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그의 작업에는 대상을 선택하고 촬영하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타인이 촬영한 사진을 선택하고 가공하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가 다루는 사진들은 예술적인 목적과는 무관하게 모두 개인적인 기록의 용도로 제작된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이 사진들은 작가의 개입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변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술사진이 있기 전에 매체로서의 사진 그 자체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작업의 내용보다 작업의 방식에 더욱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생산된 사진의 예술적 수용 가능성 보여줘

그럼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사진의 발명 이후 사진은 다양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어 왔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사진은 정해진 목적에 따라 촬영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개별 사진이 특정한 하나의 목적만을 지닌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사진은 언제든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쉽게 가지 못하는 장소의 유적을 촬영한 사진은 기록과 보존의 용도로 쓰일 수도 있지만, 관광 홍보를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을 기록한 사진일지라도 그것이 예술의 맥락에서 소비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사진을 직접 찍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진을 선택해 맥락을 재형성했는가에 있다.

AHS 07 Archival digital C print, 80x120cm, 2011

이쯤 되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마르셀 뒤샹이다. 잘 알려져 있듯 뒤샹은 기성품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그것에 예술품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작품의 직접 생산 여부는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는 준거가 되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미 존재하는 대상일지라도 그것은 작가에 의해 부여받은 맥락과 제도에 따라 예술작품으로 변모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이 본격적으로 예술의 지위를 부여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음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회화를 추종하지 않는, 사진의 기계적 재현성을 강조한 스트레이트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장보윤의 작업은 이미 생산된 사진의 예술적 수용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굳이 직접 촬영하지 않더라도 작가에 의해 새롭게 맥락을 부여받은 사진은 오브제로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그의 작업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에 걸려 젠체하는 수많은 예술사진들 못지않게 우리의 서랍 속 앨범도 이미 충분히 예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