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 “비워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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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폴 세잔 “비워라, 얻을 것이다”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① 폴 세잔

기사입력2015-02-26 17:45

(주)예술만세 객원 기자 (artmanse2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내 자신이 화가로서 이따금 정체성이 모호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다른 시대의 화가들은 어땠을까?’ 궁금증이 일곤 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그렸을까? 성격은 어땠을까? 어떤 조형원리를 구사했을까? 다른 화가들의 사사롭고 자질구레한 부분까지 알고 싶어졌다.”

이번 연재는 류장복 작가가 평소 관심을 두었던 르네상스 미술에서부터 추상미술이 등장하기까지 다양한 관점을 지닌 화가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이다. 미술사를 바꾼 예술가들의 흥미진진한 삶이 펼쳐지고, 원고 속 도판들은 화가의 그림을 보고 류장복 자신이 직접 목탄으로 그렸다.<편집자>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대기가 출렁거리잖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그림을 처음 보았다. 다른 인상주의 그림들과 같이 걸려 있었던 그리 크지 않은 그림이었다. 숲을 그린 단순한 그림이었는데 눈길을 끌었다. 그림 앞에 서서 한참 보았지만 딱히 특별한 요소를 찾지 못했다. 가끔 그 그림이 생각날 때마다 궁금증이 일었다.

세잔은 모네처럼 반짝이는 빛으로 그림의 표면을 온통 덮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피카소의 큐비즘과 같이 형식이 두드러지지도 않았다. 그의 그림에 모네와 피카소가 함께 있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 모네는 세잔과 동시대의 화가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빛의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고, 피카소는 42년 늦게 태어난 후세대로 세잔의 영향을 받아 큐비즘을 열었다. 세잔의 그림은 모네의 빛과 피카소의 구조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뭉뚱그려져 있었다.

세잔이 생 빅투와르 산을 연작으로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는 몇날 며칠이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말뚝처럼 서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매일 밭에 나와 일하던 농부는 그런 그가 궁금해졌다. 농부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림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뭘 그리는 겁니까?”

“저 산을 그리고 있잖소!”

세잔의 자화상을 보고, 49.7x34.7cm charcol on paper, 2013

젊은 화상 솔라르를 그릴 때도 그랬다. 솔라르는 무려 115번이나 세잔의 이젤 앞에 서서, 그것도 꼼짝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세잔은 말없이 신중하게 붓을 놀렸다. 움찔거리기라도 할라치면 늙은 화가는 노골적으로 신경질을 냈다. 쉬는 시간을 틈타 작업 중인 그림을 보고 있는 화상의 눈에 굳이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던 이유가 선뜻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눈길을 끄는 요소가 있었다.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대기가 출렁거리잖아!”

세잔은 존재의 숨소리를 좇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내내 모델에게 사과처럼 있을 것을 주문하면서 모델의 꼼지락거림을 못마땅했다. 모델이 간 후에도 그는 남아있는 모델의 온기를 좇아 오랫동안 붓을 놓지 않았다.

보나르의 증언에 따르면 세잔은 그림을 펼쳐 놓고 붓을 든 채 도마뱀처럼 햇볕을 쬐면서 가만히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불안정한 표면을 뿌리치고 흔들림 없는 실재를 좇아 또 한 번의 붓질을 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대상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올 때까지 세잔은 기다린다. 대상의 존재가 마음에 들어차 고일 때까지, 대상이 나를 볼 때까지 그는 신중하게 기다리고 또 기다린 후에 한 획을 옮긴다.

“눈은 생동하는 자연에 두고, 머리로는 감각의 논리를 펼쳐야 합니다. 나는 세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순간일지라도 자체로 그 순간이 된다면 그것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이나 모델링 같은 것은 없죠. 단지 색채의 대비만이 있을 뿐입니다.” -폴 세잔

세잔의 그림은 태양의 제물로 바쳐진 인간의 감각적 산물

세잔의 정물 오렌지와 사과를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폴 세잔은 수줍음이 많고 고집스러우며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의 우울증은 기존 사회의 상징체계에 편입되지 못해 방황하는 자아의 정서로, 극도로 작아지는 존재감에서 비롯된다. 우울증 때문인지 세잔은 벌컥 화를 잘 내며 주변 사람들과 친분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 우울증은 오직 자신의 상징기호였던 그림을 통해서만 덜어질 수 있었다.

세잔은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청장년을 보냈다. 그는 평생 돈벌이를 할 필요가 없었던 대신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법학을 포기하고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지원받았던 생활비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아틀리에 쉬스’의 모델이었던 부인과 동거하며 아들까지 낳았어도 그 사실을 집에 알리지 않은 채로 16년을 그렇게 지냈다. 곤궁해진 그가 처자와 함께 고향 근처에 내려와 살 때도 땅거미가 지면 헐레벌떡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가 저녁식사에 참석했다.

그래도 세잔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아침마다 궁색한 자신의 형편을 투덜거렸지만 그림도구를 챙겨 빅투와르 산 앞에 서면 어느새 기분이 말끔해졌다. 물감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여 이내 감각이 발동하고 얼마 안 있어 그는 그림 속에 들어가 있었다. 마약환자가 환각상태에서 행복을 느끼듯 그는 그림 안으로 훌쩍 떠나기를 반복했다. 매번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돌아와야 했고 현실로 돌아왔기에 또다시 떠날 수 있었다. 모름지기 화가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는 물론이고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을 때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일단 그림을 시작하면 즐거워진다.

“평원 위에 무중력 상태로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산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정신적 거간꾼처럼 거기 존재했다.”

리처드 베르디가 1992년 <세잔>이란 책에 쓴 구절이다. 그에 따르면 세잔의 그림은 신성한 태양의 제물로 바쳐진 인간의 감각적 산물이다. 세잔의 그림 속에서 ‘빅투와르 산’은 허공 속에서 다른 차원의 자연으로 존재한다. 세잔은 열린 감각으로 투명한 공간을 탐색했다. 육안으로 지각되는 공간의 깊이는 투시원근법으로 측량되는 공간의 깊이와 다르다. 그의 회화공간에 빛으로 충만한 여백이 있다.

그날도 세잔은 엑상 플로방스의 길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흠뻑 젖었지만 늙은 화가는 그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지나가던 농부의 수레에 실려와 일주일간 폐렴을 앓은 끝에 67년의 생을 마감했다.[글=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