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삶도 마다하지 않았던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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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밑바닥 삶도 마다하지 않았던 ‘반 고흐’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③빈센트 반 고흐

기사입력2015-05-13 19:35

(주)예술만세 객원 기자 (artmanse2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Van Gogh,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테오야, 난 실패한 것 같아!”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현수막에 쓴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다. 낯선 글자와 글자 사이로 고흐의 숨소리가 새나오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짠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2층으로 옮겼다. 어두컴컴한 유리박스 안에 고흐의 성실한 소묘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그 끄트머리에 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림은 어두운 조명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호롱불빛 아래 모여 앉아 감자를 나누어 먹는 가족들이 마치 거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사람들이 번뜩이는 눈으로 감자를 나누어 먹는 장면은 그 자체로 생존의 리얼리티를 보여주었다. 호롱불빛이 닿지 않은 나머지가 온통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붓끝이 살아 움직였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림이 내뿜는 강렬한 힘에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후 구겨진 허리를 펴고 일어나 인상주의의 밝은 그림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 한 그림 앞에서 딱 멈췄다. 온통 샛노랗게 양파를 그린 그림인데 칼질하듯 붓질이 나있었다. 그림과 함께 뒤흔들린 몸을 추스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매화꽃이 활짝 핀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포스터를 말아 들고 멍한 눈으로 미술관을 빠져 나왔다.

신의 사랑 실천으로 옮겨

반 고흐는 모든 것에 경건한 사랑의 눈길을 보냈다. 날아가는 새, 연기를 토해내는 굴뚝, 수풀 아래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려 하면서 의인화된 자연의 뛰는 맥박을 짚으려 했다.

“나는 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에서 늙은 홀아비의 긴 행렬을 보고, 순수한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곡식에서 잠자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오가는 발걸음에 짓밟히는 길가의 잡풀에서 피곤한 노동자의 억눌린 모습을 보곤 해”-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반 고흐는 삶과 자연 속에서 자신을 대상과 동일시하여 내적으로 결합한, 너이자 곧 나인 대상의 이미지를 드러내려 했다. 그는 자연의 일부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총체를 감지함으로써, 말하자면 그림에서 흙냄새가 맡아지기를 바랐다. 이를 위해 실제로 그는 비천한 밑바닥의 삶으로 내려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과 거적을 덮고 함께 기거하기를 자청했고 창녀와 동거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신의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는데 있어 적극적이다 못해 저돌적이었던 그를 주변 사람들은 못내 불편해했다.

반고흐의 가쉐 박사의 초상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화가 도미에의 그림이 나쁜 구습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가 옹호했던 3등칸의 사람들과 농부들의 삶에 대해 말한 적은 없다. 반 고흐의 그림은 그림 자체로 말한다. 그는 말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다. 이상적 가치를 설명하기보다 그것의 실재로 그림을 제시했다. 꾸며지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를 그림의 실재로 담아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희미한 등불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이들이 감자를 집어 올리는 바로 그 손으로 직접 땅을 파서 일구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려고 애썼어”

반 고흐는 감성의 참된 순수함을 믿었다. 성경을 주제로 신앙을 말하는 현대의 성경미술이 그의 눈에는 허위로 보였다. 일상에 녹아있는 신성을 엿보려고 했던 그는 배추 한 포기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동등하게 취급하지는 않지만 훌륭하게 그려진 배추가 조악하게 그려진 예수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반 고흐의 생각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분명하게 눈에 보이는 구상적인 형상으로 나타났다.

반고흐의 사랑, 고갱 그리고 테오

반 고흐는 거듭해서 사랑에 실패했다.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영국에서 화상이었던 작은 아버지를 도와 일하던 중에 처음으로 하숙집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후에 벨기에 남부의 탄광촌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그는 탄광노동자와 똑같이 생활하며 신의 사랑을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인 그의 행동을 사람들은 외면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혼한 사촌누이에게 맨손을 촛불에 얹고 참을 수 있을 동안만이라도 만나달라며 동정어린 구혼을 청하지만 여지없이 거절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고흐는 시엔을 만났다. 그녀는 늙은 창녀였다. 이번에도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앞뒤 가리지 않은 결정과 주저 없는 행동으로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사랑은 잠시뿐이지만 잿빛 음울함 속에서 우린 새로운 것을 배운다며 자신의 용광로 속에 남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녹여내려 했다. 이 땅에 어떻게 이토록 버림받은 여자가 있을 수 있는가, 애정 어린 눈길로 탄식하던 그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슬픔’이란 드로잉을 걸작으로 남겼지만 현실에서 그에게 돌아온 건 고약한 성병이었다.

반고흐의 양파가 있는 정물을 보고,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반 고흐는 주변의 만류로 시엔과 헤어진 후 동생 테오와 파리에 정착하지만 3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섬세하고 다정한 자아와 지독하게 이기적인 자아가 하루에도 몇 번씩 번갈아 나타났다. 테오는 형에게 따뜻한 남부 아를의 노란 집에 아틀리에를 장만해주었다. 파리의 화려한 도시 불빛과 인상주의의 쾌활한 색채로부터 받았던 영향이 작품 속에서 아를의 찬란한 빛으로 피어나지만 그의 야생성은 결코 속된 현실에 속하지 못했다. 그는 예술가의 집단 공동체 생활을 꿈꾸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의 주선으로 고갱이 나타났다.

반 고흐는 아낌없이 모든 걸 내주며 이상적인 공동의 삶을 원했다. 하지만 고갱은 역설과 조소를 일삼으며 남을 가르치려드는 전형적인 도회지 사람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했던 반 고흐에게 고갱은 목엣가시처럼 껄끄럽기만 했다. 어느 날 사소한 다툼이 있었고 반 고흐는 발작적으로 귀를 잘라 헝겊에 싸서 창녀에게 가져다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정신적으로 교란된 상태에서 스스로를 감당할 수도 없었지만 동시에 그나마 어쩔 수 있는 대상도 그 자신뿐이었다.

어느 날 반 고흐는 황금빛 들판이 보이는 둔덕배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또 발작증세가 일자 품에서 총을 꺼냈다. 총구를 몸통에 대고 쏘았다. 값싸게 구입한 총은 불발했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굉음이 들판에 울려 퍼지며 옆구리가 관통되었다. 마을입구에 쓰러져 있는 그를 마을사람들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반 고흐는 줄기차게 태양을 그렸다. 아른대는 햇빛보다 태양 자체를 원했던 그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마지막 70일 동안 70장의 유화를 그렸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스스로를 가학적으로 소진시켰다. 영원한 비상을 꿈꾸며 날아든 반 고흐를 태양은 무심히 받아들였다.

침상에 누운 반 고흐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들었다. 두렵고 또 두려웠지만 용광로 같은 광기의 삶을 그만 멈출 수 있게 되었다.

“테오야 울지 마라. 이게 우리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인지 모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빈센트 반 고흐는 이틀 후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2차 감염에 의한 파상풍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37살이었다.[글=류장복 화가 jangboki@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