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이미지에서 기적을 상징하는 성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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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종교적 이미지에서 기적을 상징하는 성물로 도시의 수호성인이 된 포를리의 ‘불 속의 마돈나’

기사입력2024-11-19 09:15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1428년, 북부 이탈리아의 포를리(Forlì)에서 평범한 어느 날, 역사 속으로 깊이 새겨질 사건이 일어났다. 포를리 출신의 교사 롬바르디노 다 리파페트로사(Lombardino da Ripapetrosa)의 사택에 걸려 있던 성모자상 목판화가 기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는 그때까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교사(校舍) 벽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던 이 목판화를 모두 신성시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그저 신앙을 위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던 1428년 2월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 끔찍한 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모여든 사람들 앞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불길 속에서 한 장의 종이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뜨거운 기류를 타고 공중으로 날았다. 이 한 장의 종이는 다름 아닌 성모자상을 묘사한 목판화였다. 이 목판화는 불길을 피해 유유히 공중을 떠돌다, 사람들의 손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기적이다!”라고 외쳤다.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하늘을 날아 내려온 성모자상 목판화는 곧 포를리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불 속의 마돈나’와 새로운 예배당

‘불 속의 마돈나’, 14세기 말부터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목판화.

높이가 51센티미터, 너비가 41센티미터 정도 되는 이 대형 목판화는 화재 이전까지만 해도 그저 집 안을 장식하는 평범한 종교적 이미지였다. 만약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목판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누렇게 변색해, 어느 날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이 목판화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이날의 화재로 인해 학교 전체가 모두 시커멓게 전소됐지만, 14세기 후반이나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목판화는 마치 천상의 손길이 보호하듯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람들의 손에 내려앉았다(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이 목판화가 실제로 공중으로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학교가 모두 불탄 후, 그곳을 확인하던 중 전혀 타지도 않고 연기의 그을림조차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목판화가 날아올라 사람들의 손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화재 속에서 타지 않고 남게 된 목판화의 기적을 더 극적으로 들리게 하기 위해 덧붙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 후 이 목판화는 ‘불 속의 마돈나(The Madonna of the Fire)’라는 이름이 붙여지며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이 목판화는 단순한 종교적 이미지가 아닌, 기적을 상징하는 성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15세기 포를리의 대성당은 대대적인 재건축 중이었고, 이 때문에 ‘불 속의 마돈나’는 기존 성당에 있던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예배당에 임시로 안치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 속의 마돈나’가 있던 예배당이 점차 좁고 초라한 공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판화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찾았고, 이에 따라 더 넓고 위엄 있는 공간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불 속의 마돈나’가 성 바르톨로메오 예배당에 임시로 안치된 지 두 세기가 지난 후, 포를리 시민들은 로마 교황청에 ‘불 속의 마돈나’를 위한 새로운 예배당을 짓기 위해 공식 허가를 요청했다. 당시 포를리는 이미 100년 넘게 교황령의 일부로서, 교황청의 엄격한 관리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교황청은 특히 지역 예산관리에 철저했으며,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지출을 결정하는 것을 제한했다. 교황청은 포를리 시민들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요청한 자금 사용을 불필요한 지출로 간주하고, 여러 차례 이 요청을 거절했다.

포를리 대성당 내에 있는 ‘불 속의 마돈나’ 예배당 세부. <출처=위키미디어>

그러나 포를리의 시민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교황청에 제출한 공식 요청서에서 “순결한 성모가 지금 너무 좁고 빈약한 예배당에 갇혀 있다”며, ‘불 속의 마돈나’를 위한 예배당 건축이 “가장 중요한 도시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 것이 도시의 종교적 헌신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투자임을 강조하면서, 예배당 건축이 도시의 재정적 상황도 개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포를리 시민들의 끊임없는 요청과 강력한 신앙심에 설득돼, 마침내 1618년 새로운 예배당 건축을 허가했다. 또한, 건축 비용의 일부이긴 하지만, 1000스쿠디(scudi), 현재 한화로 약 2억9000만원 정도의 공적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1636년, 포플리 시민들의 염원이 담긴 ‘불 속의 마돈나’를 위한 예배당이 완공되었다. 대성당 내에 있는 이 예배당은 약 7.6미터의 정사각형 크기에, 높이는 약 15.2미터이며, 천장은 돔 형태로 설계되었다. 예배당을 짓기 위해 1만8000스쿠디, 현재 한화로 약 51억5000만원 정도의 거액이 들었는데, 이 중 1000스쿠디는 교황청의 지원금이었고, 나머지 1만7000스쿠디는 시민들의 기부금이었다. 이를 통해 포를리 시민들이 ‘불 속의 마돈나’를 위한 예배당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으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 알 수 있다.

도시의 수호성인이 된 ‘불 속의 마돈나’

새로운 예배당이 완공된 1636년 10월20일, ‘불 속의 마돈나’를 옮기기 위한 성대한 행렬이 있었다. 포를리의 주요 종교단체들이 참여한 이 행렬은 목판화를 옛 예배당에서 꺼내어 도시를 한 바퀴 돈 후 새로운 예배당으로 옮기는 행렬이었다. 이 순간부터 ‘불 속의 마돈나’는 단순한 예배당의 성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영적 중심지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불 속의 마돈나’ 축제 모습. <출처=www.corriereromagna.it>

‘불 속의 마돈나’가 포를리 대성당으로 옮겨진 후, 매년 2월4일에 포를리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가 열린다. 2월3일과 4일 밤에는 발코니와 창문에 양초나 전구 같은 작은 조명을 달아 1428년에 일어난 기적을 기념한다. 1636년 새로운 예배당으로 옮겨진 이후부터는 매년 열리는 축제에서, 포를리의 모든 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불 속의 마돈나’가 공개된다. 빛으로부터 보호되도록 금박 청동 패널 뒤에 보관된 ‘불 속의 마돈나’는 매년 한 번, 연극의 막이 오르듯 패널이 올라가며 공개된다. 그 순간, 시민들은 목판화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며, 성모가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준다는 믿음을 새롭게 다진다.

‘불 속의 마돈나’는 도시 경계를 넘어 확산되었다. 이 목판화는 수천, 수만 개의 복제본이 제작되어 전국 각지에 퍼졌으며, 사람들은 이를 집에 두고 개인적으로 기도하거나, 성스러운 물건으로 여겨 보호를 기원했다. 도자기 부조나 벽화로도 제작되었으며, 때로는 작은 천 조각에 그려져 신도들이 휴대하며 기적의 힘을 느꼈다.

또 다른 기적의 이야기도 이어졌다. 1629년, 포를리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토스카나로 가는 길가에 있는 떡갈나무에 ‘불 속의 마돈나’의 작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자체가 사람들에게 기적처럼 여겨졌고, 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하자, 작은 성소가 세워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성소는 낡아갔지만, 2009년에 재건되었다. 재건 과정에서 지역사회는 다시 한번 ‘불 속의 마돈나’에 대한 신앙심을 보여주었다.

포를리의 ‘불 속의 마돈나’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에게 신성한 기적의 상징이 되었다. 포를리 시민들에게 ‘불 속의 마돈나’는 도시의 모든 종교적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그 신앙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