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술과 기술매체는 미술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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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예술 ㅣ 예술경영 새로운 기술과 기술매체는 미술을 변화시켰다 기술과 예술은 원래 한 몸이었다㊤

기사입력2024-08-19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요청만 하면 AI가 그림을 뚝딱 그려주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가는 필요 없는 걸까? 아마도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려주라고 명령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이 어떻게 명령하느냐에 따라 AI가 그린 그림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AI에 명령글을 잘 적는 사람을 ‘프롬프트 엔지니어’라고 부를 정도로 이것 또한 하나의 기술이다. 그렇다면 AI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명령글을 적는 것도 AI 시대에 맞는 예술창작 기술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기술과 발걸음을 맞춰 변해왔기 때문에 이렇게 창작방식이 변하는 것도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사실 예전에는 기술과 예술의 구분이 없었다. 기술과 예술 모두 고대 그리스에서는 ‘테크네’(techné)로 불렸는데, 우리나라 말로 ‘기예’(技藝)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조련술, 구두 수선술, 꽃병 그림, 시 짓기 등의 수공업적 기술뿐만 아니라 문법이나 수사학과 같은 학예(ars liberalis)를 모두 포함한 모든 기술적 행위를 ‘테크네’(고대 그리스 시대)로 부르거나, 테크네를 라틴어로 번역한 ‘아르스’(ars, 로마와 중세, 르네상스)라고 불렀다. 고대부터 초기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예술을 하나의 영감에서 우러나오는 창작이라기보다는 솜씨나 재주 정도로 봤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까지 예술가는 장인에 가까웠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 심지어는 초기 르네상스 때까지도 기술과 예술은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예술이 기술에서 갈라진 것은 15세기 르네상스부터다.

더 잘 그려지고 더 이동하기 편한 그림

마르셀 뒤샹,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1912, 캔버스 위에 유화, 147×89.2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사진의 연속촬영에 영향 받은 작품.

예술, 정확히는 미술은 하나의 시각적 재현 기술이기에 고대부터 산업혁명 시기 이전까지 더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더 잘 그리도록 도움을 주는 기술과 재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아왔다. 또한, 그림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는 환경도 중요했다. 동굴벽화는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성격이 강해서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지만, 잘 그린 그림을 보고 싶은 게 사람들의 바람이고, 보여주고 싶은 게 창작자의 바람 아니겠는가. 잘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잘 보여주고자 하는 바람은 기술과 기술매체에 힘입어 예술을 변화시켰다.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사용된 프레스코 화법은 시각예술을 벽에 묶어놓았다. 하지만 템페라의 등장으로 그림은 벽을 벗어나 패널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예술의 시대가 열렸으며, 좀 더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15세기경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가 개발한 유화는 잘못 칠하면 수정하기 힘들었던 템페라의 단점을 보완해 더욱더 사실적이고 정밀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캔버스는 15세기 유럽의 금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가장 활발히 사용되었는데, 캔버스의 등장으로 그림은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상품화가 촉진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며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바다와 접해 있는 베네치아의 습한 기후 때문에 프레스코화를 제작하기에 좋지 않아서 캔버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그림의 상품화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당시 베네치아가 상업적인 거래가 활발한 부유한 도시였는데, 미술작품의 거래도 활발했다. 그 당시 베네치아 화단의 중심인물인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는 항상 밀려드는 주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종이처럼 둥글게 말아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벽에 그린 프레스코화나 패널에 그린 템페라 작품보다 판매가 용이하다. 캔버스의 사용과 미술작품 거래의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9세기 중반 메탈 튜브 물감 발명은 작업실에 갇혀 있던 화가들을 야외로 나가게 했다. 메탈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이전의 유럽 예술가들은 물감을 담는 데 돼지 방광을 사용했다. 돼지 방광에 물감을 담아 밀봉한 후, 사용 시 핀으로 작은 구멍을 내어 물감을 압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돼지 방광은 완벽한 밀봉이 어려워 물감이 마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휴대 및 운반 시 터질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화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1841년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의 예술가 존 G. 랜드(John G. Rand)가 마개가 있는 메탈 튜브를 발명했다. 이때부터 예술가들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야외에서 실제 자연을 보고 사생(寫生)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인상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는 “튜브에 담긴 색깔들이 없었다면 세잔도, 모네도, 피사로도, 그리고 인상주의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메탈 튜브 물감이 미술가의 습성과 미술의 형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와 같이 템페라, 유화, 캔버스, 메탈 튜브 물감과 같은 새로운 기술과 기술매체는 미술을 변화시켰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홍익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