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마음을 환상과 교환한 ‘잔상’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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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시간과 마음을 환상과 교환한 ‘잔상’이 일렁인다 환상과 이곳 사이…이지윤 작가 개인전 ‘Room for Escape’

기사입력2024-10-08 15:56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지난 9월, 그 첫 주에는 정말 많은 전시가 열렸다. 프리즈 서울(Frieze Seoul)과 키아프(KIAF), 서울 아트 위크와 연계한 여러 야간행사, 학술행사, 그리고 각종 파티와 이벤트…. 세상에 이렇게 많은 작가가 있었던가? 서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가? 여러 무리의 사람과 마주쳤고, 각기 다른 욕망이 교차하는 광경을 보았다. 작품 판매, 작가 홍보, 담론 연구, 네트워킹부터 그저 즐거움을 위한 자리까지. 무엇을 봐야 할지, 어디에 방문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이곳저곳을 휩쓸리듯 다녀오다 보니 어느새 아트 위크가 끝나 있었다.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에서야 내가 보았던 것과 그 경험을 통해 생각한 것을 그러모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양한 전시와 행사 속에서도 나는 특히 개인전을 보러 가는 선택을 했고, 총 열두 개의 개인전을 보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하나의 전시가 있다. 영상과 설치 작업을 하는 이지윤 작가의 개인전 ‘Room for Escape’(2024.9.1~9.15, 팩션)다. 전시가 열리는 공간 팩션(Faction)의 입구에서 몇 개의 계단을 밟고 지하공간으로 내려가니, 어둑한 공간을 커다랗게 차지한 세 개의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전시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한동안 나는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은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영사되고 있었다. 두 개의 영상 ‘loitering set’와 ‘host zone set’를 상영하는 프로젝터는 천장을 향해 붙어있다. 렌즈를 통과해 나온 빛이 프로젝터 바로 위에 설치된 거울을 통해 굴절되어 건너편 벽면으로 투사된다. 건너편 벽은 평평하지 않다. 한 칸짜리 거대한 계단과도 같은 벽이 공간을 반으로 썰어낸다. 굴절된 빛, 아니 빛과 함께 운반되는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 특수한 구조로 인해 이미지에 깊이와 조각난 면이 생긴다. 벽면을 가르는 위아래를 기준으로 더 깊은 공간에는 특수한 거울이 끼워져 있다. 이때 거울을 통해 빛이 천장으로 반사되어 맺힌다.

이지윤 작가, ‘Room for Escape’, 영상 설치 전시 전경. <촬영=양희진>

아주 단순한 만화경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두 개의 영상. 이것들은 비밀스러운 규칙을 통해 작동한다. 두 영상은 각각 14개의 영상으로 구성되는데, 작가가 설정한 알고리즘을 통해 12개가 무작위로 재생된다. 앞뒤가 느슨히 연결되는 영상들. 누군가는 이를 이야기나 사건이 발생하는 것처럼 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이야기에 속아버리고 싶은 자신을 인지하게 만드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진행 중인 시간.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공간 속에 일렁인다. 반대편 벽면에는 모서리가 둥근 스크린에 영상 ‘field trip’이 재생된다. ‘견학'이라는 단위로부터 출발한 이 영상은 누군가의 시선이 담긴 경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자주 소비하는 이미지 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깜깜한 화면 속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때때로 무늬처럼 보이는 모양들이 어둠 속에 모였다가 흩어진다. 전시장에 있는 모든 영상들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나를 일상이 아닌 다른 시간으로 이끌었다.

자연 그 자체가 아닌,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면 많은 장치를 꼼꼼히 뜯어보는 일이 필요하다. 모두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이 전시는,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말해도 지켜지는 비밀”처럼 작동할 것이다.

꽤 오랜 시간 전시장에 머물렀지만 내가 본 영상의 내용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경험을 언어로 정리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보았던 것이 오작동하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어떤 상태를 유비적(두 개의 사물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다른 속성도 유사할 것이라고 추론하는 일)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환상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상황과도 유사할 것이다. 이 환상은 처음과 끝,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와 다르게 이음매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흐른다.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시간을 사용할 수 있고, 그것을 무언가와 교환할 수 있다. 욕망 실현, 진리 추구, 온전한 유희 어쩌면 슬픔에 잠기는 것까지도…. 시간과 마음을 환상과 교환한 ‘Room for Escape’ 속 잔상이 눈앞에 일렁인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