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보지만, 오래 고민하며 남길 것을 선택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많은 것을 보지만, 오래 고민하며 남길 것을 선택 2분30초의 삶, 2700개의 프레임

기사입력2023-11-13 15:03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2분30초. 최근 공개되는 K-Pop 노래 한 곡의 길이가 약 2분30초라고 한다. 한 곡에서 다음 곡으로 이동이 빨라진다. 음악제작과 유통이 손쉬워지며 우리가 음악에 푹 젖을 수 있는 낭만적인 순간이 2분30초까지 짧아졌다. 우리는 더 오래 듣는 대신 더 많이 듣게 됐다.

2분30초. 내가 얼마 전에 사용해 보기 시작한 슈퍼 8(Super 8) 비디오카메라 필름 카트리지 1개가 녹화할 수 있는 길이와도 같다. ‘슈퍼 8’은 1965년 미국 코닥(Kodak)에서 만든 비디오 필름 포맷의 이름이다. 슈퍼 8 필름은 가로 약 8mm(실제로는 7.90mm) 크기에 약 50피트(약 15m) 길이이며, 한 카트리지당 2분30초 분량의 영상을 찍을 수 있다.

슈퍼 8 카메라를 이용하면 18 fps(frame per second)의 영상을 얻는다. fps는 ‘프레임 레이트’(frame rate) 라고 하는데 1초에 몇 개의 화면이 지나가는지를 갈음한다.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영화는 24fps, 디지털 방송은 30fps를 채택한다. fps 앞에 쓰인 숫자가 클수록 더 매끈하고 자연스러운 영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프레임레이트를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슬로우 모션(slow motion) 영상에 적합한 프레임레이트는 60fps다. 우리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움직임까지를 더 잘 보기 위해서 1초를 60장면으로 기록해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로 미루어 보아 18fps로 영상은 ‘움직임’이라는 구색을 겨우 갖추고 있다. 어설픈 영상이다.

나는 오버헤드 영사기(overhead projector), 마이크로 카세트(microcassette recorder)와 같은 옛 기계장치 그리고 먹지(carbon paper)처럼 손을 이용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곤 했다. 이것들을 만지거나 사용할 때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살펴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에. 그리고 어디서든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것이 없으면 좋겠기에. 슈퍼 8 카메라 역시 내가 사용해 본 적 없는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이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셔터를 누르는 촬영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2분30초 길이의 필름을 통해 담긴 영상의 스틸 이미지. <촬영=박선호>

홀린 듯 중고장터를 며칠간 수소문했다. 워낙 옛날에 쓰이던 물건이기도 하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기에 맘에 꼭 드는 것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야시카(yashica) 사에서 나온 크고 무거운 카메라 한 대를 겨우 구했다. 이 카메라는 이것저것 기능이 많았지만, 방아쇠를 당기듯 촬영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었다. 어쩐지 정이 가지 않는 커다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친구가 조금 더 예쁘고 조금 덜 무거운 카메라를 선물해 줬다. 들뜬 마음에 당장에라도 뛰어나가 뭔가를 찍어보고 싶었지만, 몇 날 며칠… 아니 몇 주간 카메라를 선반에 둔 채로 노려보기만 했다. 좀처럼 뭔가를 쉽게 찍을 수 없었다.

저장매체의 용량이 허락하는 한 무한히 찍을 수 있으며 촬영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삭제가 가능한 디지털 영상과 다르게, 필름으로 영상을 찍고 받아보는 과정은 무척 까다롭고 번거롭다. 디지털 캠코더로 영상 촬영을 시작한 내게 촬영한 뒤 바로 보거나 삭제할 수 없는 생소한 촬영 과정과 한정된 시간만 찍을 수 있다는 제한은 시험처럼 느껴졌다. 몇 주간 무엇을 찍을지 고민했으나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든 빠르고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이 시대에 무슨 일인가 싶었으나, 두려움을 무릅쓰고 첫 롤을 개봉했다. 이후 셔터를 누를 때 계획을 세우자는 마음을 지우고 본능에 의존했던 것 같다. 한 롤을 삼 일에 걸쳐 찍고 그 다음 월요일에 필름을 맡겼다. 요즘에는 필름을 잘 사용하지 않아 필름이 매우 귀했을 뿐 아니라 현상소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현상한 필름을 스캔한 뒤 디지털 변환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한 카트리지 분량의 영상을 받아볼 수 있었다. 긴긴 기다림의 연속.

파일을 열어보고 처음에 조금 놀랐다. 카메라 자체 설정을 잘못해 영상이 오렌지빛을 강하게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빛바랜 듯한 느낌과 미세하게 일렁이는 입자들이 신기해 한동안 영상을 돌려봤다. 화면 안에 담긴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망설인 게 민망할 정도로 내가 찍은 것들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걸어가는 친구들의 뒷모습, 길 가다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 해가 잘 드는 방의 창문, 차를 타고 가며 본 풍경, 햇빛이 반사되는 물. 실로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니 나름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망설임까지가 모두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분30초 길이 필름을 통해 담긴 영상은 내가 찍은 영상 중 가장 짧지만, 오래 고민한 영상이다. 한 카트리지에 담긴 장면을 셈해보면 대략 2700프레임이다. 앞으로 이곳에 사소하지만 소중해 보이는 것들을 담아보려 한다. 많은 것을 보지만 오래 고민하며 남길 것을 선택해 보려 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