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화도 초상화도 아닌, 삶이 풍경이 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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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종교화도 초상화도 아닌, 삶이 풍경이 되는 그림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미술산책…피터 브뤼헐의 ‘농가의 결혼식’

기사입력2023-01-09 14:06

안개가 자욱한 11월 초,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회를 떠올리며,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현장의 느낌을 다시 기억해 보고 싶었습니다.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회화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유럽의 근대사가 곧 가문의 역사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세운 웅장한 두 개의 건축물 중 한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독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는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 중앙에 미술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신전의 돔을 얹어 황실 컬렉션의 위엄과 고전미술에 대한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높은 돔 천장이 인상 깊은 입구를 지나 웅장한 궁전의 계단을 오르면 두 갈래의 회화관으로 들어갑니다. 회화관에는 플랑드르 미술과 이탈리아 베네치아 화파 그림을 맘껏 볼 수 있어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며 두 지역의 세계관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회화관에 플랑드르 미술과 베네치아 화파 작품이 유독 많은 것은 미술품 수집광이었던 레오폴드 빌헬름 대공(1614~1662)의 취향 때문입니다. 페르디난트 2세 황제(1578~1637)의 아들로 네덜란드 총독 부임 시절, 그는 브뤼셀에서 플랑드르 미술작품의 매력에 빠져 루벤스와 렘브란트, 얀반 에이크와 브뤼헐 일가의 작품을 사 모았습니다. 그 중 피터 브뤼헐의 작품들은 플랑드르 미술관으로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가치를 인정하게 해줍니다.

피터 브뤼헐(1527~1569)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미술사가 카렐 판 만더의 책 속에서 짧게 언급된 것이 전부일 정도로 생애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은 화가입니다. 그는 1552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탈리아 화풍을 접하지만, 인물 표현에 있어서는 조각상 같은 이탈리아식 데생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 있는 ‘나폴리항 전경(1556년 작)’이라는 풍경화를 남긴 것으로 그의 여행 기록을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가 여행 중 본 이탈리아 풍경은 브뤼헐 미술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브뤼헐 작품은 언제나 풍경화 구도를 유지합니다.

낮은 지대인 플랑드르 지역에 비해 이탈리아의 산과 바다, 넓은 들판이라는 새로운 풍경은 화가의 눈을 자극하고 세계에 대한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었죠. 초기 작품들은 멀리서 전체 공간을 바라보는 풍경을 그리는데 ‘인간 세상은 넓고 할 말은 많다’는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피터 브뤼헐, 1560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여행 후 안트베르펜에서 피터 브뤼헐이 그린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마을 전체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200여명의 아이들이 70가지가 넘는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은 풍속과 전통, 소박한 일상의 삶 그 자체의 소중함을 보여줍니다. 비판적 종교화나 야심가의 초상화보다 사람들의 삶이 담긴 풍경화에서 브뤼헐은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찾고 있죠. 이 시기의 그림들은 드론을 높이 띄워 도시의 풍경을 스캔하는 앵글같습니다. 그는 기록을 남기는 중이며 화가는 상황의 옳고 그름에 판단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화면을 비추는 객관적인 시선은 ‘미덕’을 강조하는 고전미술의 비평 기준 때문에 한동안 저속한 풍속화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미술 비평의 기준에 다양성이 들어오면서 피터 브뤼헐 작품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함이 재평가되고 있기도 합니다.

나를 즐겁게 했던 ‘농가의 결혼식’은 40대가 지나서 둘째 아들 얀 브뤼헐을 낳은 해에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 초중반에 스승의 딸 마예헨 코헤(Mayeken Coecke)와 결혼해 브뤼셀에 정착합니다. 브뤼셀에서 그는 농촌생활을 즐겨 그렸습니다. 농부들의 식사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고, 마을회관에서 소박한 축제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런 농촌의 정겨움은 브뤼헐 후기 작품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농가의 결혼식’은 그가 더 이상 멀리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모든 순간에 초대받아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 흥겨움과 감정을 교감하고 있는 것이죠. 브뤼셀 시절 그의 눈은 사람들의 일상을 더 자세히 관찰하고 그림 안에 생생한 캐릭터로 살려냅니다.

소박한 농가에서 결혼식 피로연이 열렸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결혼 피로연장 역시 흙벽으로 둘러싸인 창고입니다. 추수의 마지막 볏짚이 유일한 장식인 공간에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문짝 위에 얹은 옥수수죽과 우유, 맥주가 유일한 음식입니다. 이 작품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구도 때문입니다. 초기 작품에는 보이지 않던 사선 구도 덕분에 그림에는 깊고 입체적인 공간이 만들어졌으며 감상하는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산만하지 않게 그림 속 인물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주죠. 사람들의 시선은 음식을 나르고 있는 두 남자가 그려진 오른쪽 아래로부터 연회장에 들어오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이는 왼쪽 위로 자연스럽게 따라갑니다. 또한 색으로 역동적인 삼각 구도를 만들어 공간의 입체감을 더욱 생동감있게 만들었습니다. 음식 나르는 두 남자의 하늘색 옷, 빨간 옷 그리고 악사의 빨간 옷은 선명한 색으로 삼각구도를 이루네요.

‘농가의 결혼식’, 피터 브뤼헐, 1568년,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이제 주인공 신랑 신부를 찾습니다. 녹색 천이 있는 자리에 화관을 쓰고 소박한 신부화장을 한 신부가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습니다. 뭔가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는지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죠. 신랑은 어디 있는가? 네덜란드의 전통에 따라 신랑은 저녁에 올 것이라는 의견과 결혼 피로연에서 신랑이 손님들을 대접해야 하는 네덜란드의 전통 때문에 술을 따르는 남자일 것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는 신부와 비슷한 옷을 깔끔히 차려입고 술을 따르고 있죠. 신부의 오른편에는 신부의 아버지가 잘 차려입고 긴의자에 앉아 있고 옆에 신부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곁에 수도사와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고 점잖습니다. 검은 모자의 남자는 브뤼헐 자신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부의 왼쪽에는 마을 주민들이 앉아 있는데 검은 모자를 쓴 일명 ‘동네 바보’가 보입니다. 이런 사람은 중세 궁정의 광대처럼, 마을엔 꼭 한 명씩 있음직한 지능이 조금 모자라거나 순수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수도사와 악사, 마을청년들과 아낙네, 어린아이들과 악사, 이것이 농촌 사람들이라는 구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터 브뤼헐의 ‘농가의 결혼식’은 눈에 띄는 화려함이나 대단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아니지만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눈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현실의 삶을 돌아보는 것,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우리들의 모습도,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어 기분 좋게 기억할 만한 삶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2023년 한해도 소박하지만 누군가와 공감하는 삶을 나누는 작은 행복으로 일상이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봅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