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는 계급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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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온도’는 계급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냉기와 보존의 정치…박정혜의 개인전 ‘고대의 냉장고’

기사입력2025-01-12 10:00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박정혜, ‘Condenser’, 린넨에 아크릴릭, 160×130cm, 2024.

회화는 종종 회화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견주어지고는 한다. 때로 회화는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며, 때로 잠든 연인의 옆모습이다. 박정혜의 개인전 ‘고대의 냉장고’(실린더2, 2024. 11.30~12.29)에서는 냉장고가 회화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가 된다. 전시는 “회화가 에너지를 저장하고 통제하는 매체라는 점에서 (…) 냉장고와 닮아 있다”고 본다. 실로 전시공간에 놓인 회화는 냉장고를 닮아 있다. 그러나 냉장고의 매끈한 앞면이 아니라, 냉매를 압축시키고 열에너지를 순환시키는 감추어진 뒷면을 더욱 닮아 있다. 말하자면 전시는 디자인된 상품으로서의 냉장고가 아니라 기계로서의 냉장고를 다룬다.

회화가 기계에 관심을 두었을 때, 그 결과가 좋지만은 않았다. 미래주의자와 같은 근대의 화가들은 기계를 찬미했다. 기계의 속도와 힘을, 그러나 종국에는 폭력을 찬미했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자동차를 향한 매혹은 곧 전장을 휘젓는 전투기를 향한 파시즘적인 매혹으로 굴러떨어졌다. 다만 냉장고는 가정에 놓이는 사물이고, 가사 노동의 동료다. 폭발적인 굉음이 아니라 은은한 화이트 노이즈를 생산하고, 인간의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전투기의 속도가 아니라 음식의 부패를 막고 원 상태를 보존하는, 느린 속도를 만들어낸다. ‘고대의 냉장고’는 회화가 기계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또한 이것은 온도에 대한 이야기다. 회화가 그렇듯, 냉장고 역시 하나의 경계다. 회화와 냉장고는 무엇을 보존할지 결정하는 경계를 형성한다.

미디어 이론가 니콜 스타로시엘스키(Nicole Starosielski)는 근대성의 출현과 온도를 균질하게 만들고 규제하는 능력이 가깝게 맞닿은 것이라고 보았다. 근대성은 표준을 필요로 했고, 온도 역시 ‘표준 온도’를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표준 온도’를 산출하는 공식을 고안할 때, 그러한 온도를 체험할 개인의 신체는 백지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상상되었다. 그 신체는 인종과 젠더를 갖지 않고, 그만큼이나 예측 가능한 신체로 상상된 것이다. 하지만 근대적 온도 관리장치가 등장하기 이전, ‘표준 온도’를 탐지했던 것은 인종과 젠더, 나아가 계급이 덕지 덕지 붙은 실존하는 몸이었다. 귀족의 영지를 돌보는 하인들은 그들이 쾌적한 온도를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난방과 냉방을 관리하는 노동을 도맡았다. 이들이 자신의 몸을 이용해 더위와 추위를 감각할 때, 그들은 온도 인프라의 일부가 되었다. 동일한 기후대에서 살아갈지라도, 온도는 계급과 사회적 위치에 따라 달라졌다.

박정혜, ‘Vacancy’, 린넨에 아크릴릭, 160×130cm, 2024.

또한 식민주의를 연구하는 히이레이 줄리아 카베히푸아아카하오풀라니 호바트(Hiʻilei Julia Kawehipuaakahaopulani Hobart)는 차가움에 대한 쾌락이 미국의 식민주의 프로젝트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인공적으로 얼음을 만드는 기술은 운송 과정에서 음식을 보존하는 데 사용되면서, 거대한 글로벌 식료품 운송 체인을 구축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온도 조작은 식료품을 최적의 시점에서 보존하고 판매할 수 있게 했으며, 전 지구적 식료품 물류 시스템을 건설했고, 그 결과 식민지 점령과 무역을 원활하게 만드는 매개가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온도가 분배되고 측정되는 방식이 다분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다시 ‘고대의 냉장고’로 되돌아간다. 냉장고에 담긴 식료품은 언젠가 썩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회화에 담긴 것은 그보다는 오래 보존될 것이며, 어쩌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영생할 것이다. 회화는 가장 무한한 저장 기술이고, 그렇기에 현실의 배치로부터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온도를 영원히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정치를 가질까? 또 다른 온도를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낼까, 아니면 정치와 분리된 영원한 보관소가 될까?

해가 질 무렵 찾아갔던 전시공간은 스산하고 추웠다. 이건 정말로 냉장고 같다고 생각하며 전시장을 벗어났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며칠이 지난 후, 비상계엄 이후 탄핵을 표결하기 위한 시위에 나갔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해가 질 때까지 진행된 시위는, 사람이 많았지만, 무척 추웠다. 시위가 끝나고 사람이 밀집한 곳을 지나쳐 집으로 향하는 동안, ‘고대의 냉장고’ 속 회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추상화되었을 지라도 정치는 정치의 감각을 일깨운다. 이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